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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얼굴의 경제] 한국은행이 다음 위기의 해결사로 역할 하려면

선진국에는 국민의 신뢰를 받는 중앙은행이 있다. 그들은 정치 권력에 맞서기도 했고, 성난 군중의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크게 실수한 적도 많았지만, 정작 필요한 때에는 자신의 성 안에 틀어박히지 않고 스스로를 진화시킴으로써 부서지기 쉬운 시장경제를 지켜 왔다. 이번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한국을 비켜가고 있지만 위기는 홍역이 아니라 감기·바이러스처럼 변형되어 불시에 또 찾아올 것이다. 위기를 맞아 한국의 중앙은행이 미 연방준비제도(Fed)처럼 대응할 수 있을까.

⑩ 다시 고민하는 한국은행 매뉴얼

부실이 불어나 은행이 신중해지면 대출이 줄어든다. 대출이 준다는 것은 곧 성장 둔화를 의미한다. 투자가 줄고 소비도 줄면서 실업이 급증한다. 이렇듯 경제가 취약해지면 은행 손실이 커지므로 은행은 대출을 더욱 꺼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이 설명한 대공황을 심화시킨 악순환 구조다. 지금은 바젤 협약 즉 국제결제은행(BIS) 자본충실도 규제에 의해 이 악순환이 더욱 가속화된다. 영국의 노던록 은행에서와 같은 예금 인출사태가 발생하면 패닉에 빠진다. 그래서 버냉키의 연준은 발권력을 동원하여 미국의 거의 모든 은행에 자본을 투입했던 것이다.

한국의 은행은 평상시에도 증자에 나서기 어렵다. 예대마진이나 수수료 수입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은행 평균의 절반에 불과하므로 투자 매력이 없다. 게다가 이익이 나더라도 배당을 작게 준다. 그러니 위기를 맞아 증자해 달라고 손을 벌리면 누가 호응하겠는가. 한국은행이 최종 대부자 기능에서 나아가 최종 구원자 역할을 해야 되는 국면을 가정하고 그것이 가능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미국의 연준은 물가 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지만 한국은행법은 물가 안정을 단일 목표로 규정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에 노력하면 거시경제가 안정될 수 있으며 일시적 대외 불균형은 환율 변동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우리뿐 아니라 다수의 국가들이 물가 안정 단일목표제를 채택했다. 그래서 통화 팽창기에는 한계지급준비금을 도입하거나(57조), 금융기관 및 정부대행기관의 여신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규정(67· 78조)이 있지만, 위급한 신용경색 상황에서 한은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인플레 방지를 위한 브레이크는 장착되었는데 디플레에 대응하기 위한 가속 페달은 없다는 얘기다.

2011년 9월의 개정을 통해 금융 안정에 유의해야 한다는 목적 조항을 신설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긴급 여신 조항(65조)을 강화하는 한편 공개시장 매매 대상 증권을 확대했지만(68조) 정작 필요한 시점에서 적시에 발동될지는 미지수다. 지금은 정부 부채가 커져서 지난 외환위기 때와 같은 재정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계 부채도 한계에 달해 소비 촉진책도 동원하기 부담스럽다. 같은 역경에 처한 미국은 중앙은행이 단호하게 나서서 무너지는 경제를 일단 수습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외환위기 때 한은 외환은행 증자 우물쭈물
외환위기 당시 외환은행의 증자가 필요할 때 기존 대주주였던 한국은행은 참여를 거부하다가 한참 시일이 흐른 다음 수출입은행을 통해 우회 증자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어긋난다는 게 당시 한은의 명분이었는데 평상시라면 백번 맞는 주장이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위기의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 외환은행이 하나금융지주에 인수된 후 주식 매각금액이 한은의 장부가격에 미치지 못하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시장가격에 의거해 적법하게 거래되었지만 한은이 손실을 입게 된 만큼 미래의 논란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신의 폭이 이렇듯 좁다면 나라 경제의 버팀목이 될 수 없다.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활발한 토의가 지금부터라도 이루어져야 한다.

글로벌 금융 환경이 급변하고 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한국은행법이 비상조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개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전에 할 일도 많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말이 있듯이 글로벌 위기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세세하게 파악해서 널리 공유하는 것이 첫째로 해야 할 일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중앙은행이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근거로 어떤 대책을 시행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후속 과정은 어떠했는지. 위기는 일단 터지면 촌각을 다투는 사안이므로 미리 연구해서 학계는 물론 일반에까지 널리 알려 두면 신속한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

미국에서도 버냉키의 정책이 국민적 합의는 물론 다수 의견을 반영했다고 볼 수도 없다. 한때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뉴트 깅리치를 비롯해 버냉키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상·하원 의원이나 주지사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2009년 여름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연준의 업적을 인정하는 미국인은 30% 정도로 미 국세청보다 낮은 수치였다.

미국 연준 중앙은행 적극적 역할 전례 남겨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미국보다도 더욱 강력하고 신속한 중앙은행의 대응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국민적 합의를 얻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고, 중앙은행이 단호하게 행동에 나선 전례도 없다. 이번의 글로벌 위기 전개 과정에 일어난 찬성·반대 주장과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한 연구는 글로벌 경제와 중앙은행의 대응에 대한 새로운 분석틀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중앙은행제도의 개편 방향에 대한 윤곽을 자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한국은행에는 외국어 구사능력이 뛰어난 고급 전문인력이 많다. 한은이 현재의 입장을 떠나, 깊고 다양한 조사 자료를 양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해외 근무인원을 대폭 늘려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벤 버냉키 및 유럽 중앙은행 총재인 장클로드 트리셰와 함께 삼각편대를 구축했던 머빈 킹 영국은행 총재는 변변치 못한 서민 출신이었지만 수석 이코노미스트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총재에 오르고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기까지 했다. 그가 영국은행의 경제 분석 수준을 높인 것이 중앙은행의 독립성, 나아가 과단성 있는 결정에 대한 신뢰를 형성했던 것이다. 한국은행도 상응하는 전문성을 가진 기관임을 조사자료를 통해 입증해야 한다.

1992년으로 기억되는데, 뉴욕의 도이체방크를 방문했을 때 전체 인력의 절반 이상에 달하는 많은 인원이 이코노미스트인 것을 보고 놀랬다. 이유를 묻자 “우리는 도이체 마르크를 수호하는 첨병이며 뉴욕시장을 잘 조사해야 도이체 마르크를 지킬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런 일은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 소관이 아니냐고 묻자 그들은 그들대로 많은 인력을 가지고 있는데 주기적으로 만나 의견을 교환한다고 했다. 부러웠다. 그래서 그런 은행을 만들고자 대형 우량은행이었던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일반은행이 그 정도의 투자를 할 수 있을 만큼 수익을 허락하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예산을 늘려서라도 담당해야 한다. <그림>에서 보듯 한국은행은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전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 그 직후 2008년 10월부터 2009년 2월까지 불과 넉 달 동안 총 3.25%포인트를 급속히 인하시킨다.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글로벌 위기로 폭발하는 순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피해간 만큼 다음 위기는 우리 차례일 가능성이 크다. 다음의 위기가 어디에서 촉발되더라도 거의 모든 국가가 인계철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한국에까지 쉽게 쓰나미가 몰려올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조사담당 인력을 두고 에스피오나지(첩보전) 수준으로 정보를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는 민족은 위대하다.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안목을 얻는 지혜가 있다면 더욱 위대하다.

水無常形(수무상형). 물은 고정된 모습이 없다. 중앙은행 제도도 그러하다. 진화해야 한다. 끊임없이 닥쳐올 위기의 파도에 맞서 국민의 안위를 지키려면.



최범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 전 KDI 연구위원. 신한아이티스 대표 역임.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자문관으로 금융 구조조정을 기획했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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