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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스님, 죽음은 없다 하셨죠” … 사형대서 평온했던 고금석

1975년 10월 10일 최초의 살인 현장인 전남 광산 인근에서 범행을 재연하고 있는 김대두(오른쪽). 현장 검증 장소로 몰려든 사람들 얼굴에 놀람과 분노가 역력하다. [중앙포토]
지금도 30년 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5> 사형수들의 뒷모습

기자가 돼서 처음 경찰서를 찾아간 1984년 2월 1일, 해맑은 인상의 청년이 수갑이 채워진 채 형사계 보호실에 수용돼 있었다.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서울 잠원동 신혼 부인 살해범이었다. 자신의 군대 동료이자 중학 선배의 신혼집에 들어가 혼자 있는 부인을 성폭행하려 했고, 도망치는 그녀를 쫓아가 흉기로 무려 40여 차례나 찔러 살해하고 귀중품을 털어 달아났었다.

잔혹한 범죄 사실과 달리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다. 시종 예의 바른 자세로, 간혹 미소도 지으면서 마치 남의 얘기하듯 범죄 사실을 술술 털어놓았다.

얼마 후 사진기자들이 몰려와 플래시를 터뜨리자 그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 수갑 찬 손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는 그 표정! 영락없는 살인자의 얼굴이었다. 한 인간의 얼굴에서 선과 악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니….

지금 생각하면 그는 일종의 사이코 패스(Psychopath·반사회성 성격 장애)였던 것 같다. 요즘엔 이런 범죄자가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내 당혹감은 컸다. 그는 입대 전 대기업에서 성실히 근무한 모범적인 직장인이었다.
이후 나는 그의 소식을 다시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가끔 그의 선한 얼굴과 악마의 미소가 오버랩되면서 생각나곤 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가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보다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서 출입 기자 생활이 두어 달쯤 지난 어느 날 새벽, 집에서 자고 있던 나를 삐삐(무선호출기)가 깨웠다. 반포에 살인사건이 났으니 가보라는 지시였다. 나로서는 두 번째로 맞닥뜨린 살인사건이었다.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갔다. 친구 아파트에서 기숙하던 범인이 사채업자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갖고 오게 한 뒤 바둑판으로 머리를 때려 살해하고 달아난 사건이었다.

문제는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가족사진이었다. 맙소사! 범인은 어린 시절 동네 친구의 형이었다. 나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도대체 어떤 지경으로 갔기에 이런 자포자기적 살인을 저질렀단 말인가.

이후 경찰서에서 살인자들을 접하면서 이들 대부분이 평소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됐는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이런 문제의식이 몇 년 뒤 사형수 취재로 이어졌다.

온순했던 김대두, 소년원 다녀온 뒤 돌변
첫 번째 대상은 1970년대 엽기적인 ‘살인마’ 김대두였다. 1975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까지 전국을 돌며 무려 17명을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 건국 이래 가장 악질 살인범이란 말을 듣던 이였다. 이미 십수 년 전에 사형이 집행된 사람이지만 그를 수사했던 수사관을 비롯, 교도관·교화위원들은 모두 그를 생생히 기억했다.

흉포한 성격과 용모의 소유자일 것이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일반 사람보다도 체격이 왜소했고 성품도 얌전했다. 그를 기독교로 교화했던 여전도사는 이렇게 전했다. “처음 만날 때 나도 떨렸습니다. 희대의 살인마라고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막상 보니까 너무 체격이 작고, 눈도 독하기는커녕 수줍음이 가득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는 원래 사리분별이 바른 소년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탓에 10대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외지(外地) 공장에서 일했다. 어느 날 바가지를 씌우는 구멍가게 주인과 다투다가 오히려 폭행범으로 몰려 소년원에서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출소한 그의 얼굴과 눈빛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소년원에서 그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후 포악해진 성격에 교도소를 제집 드나드는 사람이 되더니 결국 연쇄살인범이 되고 말았다.

김대두는 사형 언도를 받고 구치소에서 1년여간 지내면서 진심으로 참회하고 모범적으로 수형 생활을 했다. 그가 여전도사에게 육필로 쓴 편지들을 읽어보면 자라온 환경, 범행 후 참회 과정, 기독교를 통한 안정과 깨달음, 내세 구원에 대한 간구 등이 잘 나타나 있었다.

1980년대 초 도박에 미친 한 중학교 교사(28)가 자신의 중학교 1학년 제자(13)를 유괴살인한 뒤 암매장했다. 그 유명한 ‘이윤상군 살해사건’의 범인 주영형은 이 범행에 자신이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 여고생 제자 2명도 가담시켜 더욱 사람들의 공분(公憤)을 샀다.

그런 주영형도 구치소에서 특히 20세 안팎의 재소자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전도하는 열렬한 신앙인으로 바뀌었다. 주영형의 유언에 이런 내용이 있다. “노름에 손을 댄 뒤 돈을 잃고 화가 나서 술과 여자를 가까이했습니다. 월급으로는 이자도 못 갚아 결국 윤상이 유괴 계획을 세우게 됐습니다. 만사가 잘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사위가 잘 굴러간다는 생각에서 깨어났을 때 저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형 직전 속죄하는 의미에서 신체도 기증했다. 지방세무서장을 지낸 주영형의 아버지는 사형 다음날, 통보를 받고 달려와서 “도저히 바른 정신으로는 어렵다”며 잔뜩 술을 마시고는 취한 상태에서 아들의 시신을 가져갔다.

대부분 사형수들 생에 대한 애착 강해
사형수는 죽음 직전 최후진술을 한다. 교도관들 사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최후를 보인 사형수로는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의 범인 고금석(당시 25세)이 꼽힌다. 1986년 서울 강남 조직폭력배 간 다툼으로 8명이 잔인하게 살해되거나 중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그는 유도대학 출신으로 친한 선배들을 쫓아다니다 엉겁결에 싸움에 휘말려 그런 결과를 빚었다. 험상궂은 외모나 잔인했던 범행수법과 달리 감옥에서 “저 친구야말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 아니냐”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사형 전 3년간을 모범적으로 살다가 갔다.

사형 직전 그는 너무나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교화 스님이 눈물을 흘리며 반야심경을 외다가 그만 까먹고 말았다. 따라 하던 고금석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어 나가자 스님은 그것을 뒤따라 낭송하게 됐다. 사형수는 태연하게 미소 짓고, 스님은 울고… 완전히 위치가 뒤바뀐 셈이 됐다. 의식이 끝난 뒤 그가 도리어 스님을 위로했다. “스님, 죽음은 없다고 가르쳐 주셨죠…그래서 이렇게 웃고 있지 않습니까.”

“….”

사실 이들처럼 참회하고 깨끗하게 죽는 사형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생에 대한 애착과 함께 약한 모습을 보이고 간다. 태연하게 생활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울고 불고 매달리는 사람도 있고, 수십 명에 하나꼴로 사형장에서까지 구제불능의 극악함을 보이는 사형수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억울하다”고 무죄를 주장한 이도 있고,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힌 채 “억지 누명을 쓰게 한 판검사들에게 죽어서라도 복수하겠다”고 섬뜩한 얘기를 남기고 간 이도 있다.

살인자와 사형수들의 살인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김대두는 못 살고 못 배우고 힘없고 무시당한 사람의 좌절, 분노를 극도로 표출했다. 그는 헐벗고 무질서한 후진국 범죄자의 전형이자 극단적 모습이었다.

반면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주영형은 허망한 방탕에 빠져 제자를 죽이는 패륜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러나 그를 통해 우리는 악의 씨앗이 바로 평범한 우리 주변에 있음을 감지한다.

체력 좋고 씩씩한 고금석은 젊은이들이 갖는 혈기와 의협심이 제대로 제어되지 못할 경우 얼마나 야수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어떻게 살지 깨우쳐 주는 ‘메멘토 모리’
때때로 살인자의 과거 중에는 그 끔찍한 범죄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주는 사건이 있다. 그런 사건은 우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다가와 엄청난 일을 저지르도록 유도한다. 그럴 경우 신은 어디까지 죄를 인정해 줄 것인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선성(善性)과 악성(惡性)의 끊임없는 충돌을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당시 사형수 취재를 통해 나는 그 복잡한 인간 본성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살인자나 사형수도 ‘별종 인간’이 아니다. 우리도 누구나 인생이 잘못 풀리면 김대두나 주영형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늘 조심해야 한다. 결국 겸허(謙虛)하게 살아야 한다.

또한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도 고금석처럼 환골탈태한 새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죄는 용납될 수 없지만 사람마저 미워해선 안 된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불교의 가르침이 말해주듯 신은 인간의 어떠한 잘못도 진심으로 참회하면 용서해 준다. 그러니까 과거로 인한 회한이나 절망, 원한을 갖지 말자. 여기서 우리는 희망(希望)을 찾게 된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취재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그 생각들은 더욱 강화됐다. 똑똑하고 잘나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추락해 죄인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도,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많이 목격했다.

사형수들의 마지막 순간은 결국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은 어떨까’에 대한 숙고(熟考)로 귀결된다. 후회·자책·미련·두려움으로 가득 찬 불행한 순간으로 다가올까, 아니면 보람·만족·감사·담담함의 행복한 순간이 될까.

젊은 시절에는 내 인생의 마지막을 상상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하지만 인생의 종반전을 향해 달리는 지금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대한 생각이 역설적으로 지금 이 짧은 생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사유(思惟)케 해주기 때문이다.

중세 수도사들의 주된 가르침이었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이 말도 사실 죽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메시지 아닌가.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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