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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NIE]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한국 현대사를 표현할 때 흔히 쓰는 말이 격동(激動·정세가 급격히 움직임)이다. 세상 흐름을 읽지 못하고 일본에 나라를 뺏겼던 구한말, 36년 동안 일제 강점기의 고통이 끝나고 새 나라를 건국하려는 이들의 서로 다른 이상향이 엇갈렸던 시기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격동의 시대를 살며 나라의 미래를 고민했던 우국지사(憂國之士·나라 앞일을 걱정하는 기개가 높고 포부가 큰 사람)였다. 살았던 시대가 복잡한 만큼 인물에 대한 평가도 간단치 않다. 교과서와 신문에서 말하는 이승만은 어떤 사람일까.



이승만(1875~1965)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이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미국으로 특사 파견돼 일본의 침략상을 알렸다. 특사 활동에 별 성과가 없는 데다 한국에서 이승만을 지원하던 민영환이 을사늑약(1905년)으로 자결하자, 미국에 남아 공부했다. 조지워싱턴대·하버드대·프린스턴대 등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1910년 귀국했다. 한국 YMCA 청년부 간사로 활동하다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이승만이 일제 치하 한국 땅에서 거주한 건 이때 2년이 전부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무장 독립투쟁과 노선을 달리하고 외교를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이 독립국이 되려면 일본과 싸우기보다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당시 일본은 국제 사회에 ‘한국은 자립할 능력이 없는 미개한 국가’라고 선전했고, 한국인의 무장 봉기가 있을 때마다 미국 내 여론이 오히려 일본에 동조하는 분위기로 바뀐다는 게 이승만의 판단이었다.



 일본이 패전하자 1945년 8월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고 신탁통치를 하기로 결정된다. 이승만은 그해 10월 한국에 돌아와 김구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며 정치적 입지를 넓혀갔다.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단독 정부를 수립 여부를 놓고 금이 갔다. 김구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뛰었던 데 반해,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민주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48년 5월 10일 결국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시행됐다.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1948년 73세 고령으로 건국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3대 대통령까지 연임하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85세 나이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①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이승만 전 대통령의 편지.
② 1920년 12월 28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열린 이승만 임정 대통령 환영회 모습. 왼쪽부터 국무총리 이동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내무부장 안창호. [사진가 권태균 제공]
③ 임시정부 환국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왼쪽)과 김구.
교과서 속 라이벌



외교 이승만 vs 무장투쟁 신채호 vs 실력양성 안창호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외교를 통한 독립 운동에 힘썼다. 외교에 역점을 둔 이승만이 임정 초대 대통령이었던 만큼 세계 열강으로부터 임시 정부를 승인받고 독립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하지만 미·영 등이 주도하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독립 여론을 환기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 뚜렷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미래엔).



 천재교육 교과서에는 임정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과정이 상세히 설명돼 있다. 이승만은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를 청원하는 문서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채호와 박용만 등은 임시 정부 해산을 요구하며 국민대표 회의를 소집한다. 회의 참석자들은 창조파(임정을 해산하고 새 정부를 세우자), 개조파(임정 개편하자), 고수파(기존 정부를 고수하자)로 나뉘어 대립한다. 이 과정에서 임정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결국 임정은 대통령 직무를 다하지 않고 미주 지역 독립 자금을 독점한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탄핵·파면했다.



 독립운동가 사이에 서로 다른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서는 지학사와 천재교육에서 다룬다. 신채호는 ‘항일 무장투쟁을 효율적으로 진행해 독립전쟁을 치르자’는 무장투쟁론자였다. 안창호는 ‘교육과 산업 발전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외교론·독립전쟁론·실력양성론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의 다툼까지 더해 복잡한 상황이었다.



단독정부 이승만 vs 통일정부 김구



 천재교육 교과서는 일본 패망 이후 한반도에 미국과 소련이 주둔하게 된 경위에 대해 ‘일본군 무장해제를 구실로 미소 양군이 각각 38도선 남북에 진주했다’고 설명한다. ‘미군정은 일본인 관리와 식민 통치 기구를 그대로 이용했고, 한국인이 만든 모든 행정기구와 그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38도선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소련군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해갔다’며 남북의 분위기를 전했다.



 먼저 단독정부를 꾸린 건 남한이다. 배경은 이렇다. 미국과 소련의 회담이 계속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에 넘겼다. 그해 국제연합은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한국에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결정하고,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한다. 소련이 위원단 입국을 거부하고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해지자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 선거를 실시하라는 결정이 떨어진다. 남한만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얘기다(두산동아).



 금성출판사·지학사·미래엔·비상교육·두산동아·천재교육·리베르스쿨은 ‘남한 단독 선거가 실질적으로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반발도 컸다’며 ‘김구와 김규식이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다’고 설명한다. 교학사는 ‘남북협상은 김일성이 작성한 안을 가결하는 회의였다’고 못박고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평가한다.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이승만의 입장은 ‘정읍 발언’을 통해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가 주요 내용이다.



 이와 달리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이라는 글을 통해 통일정부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다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온데, 자기 세력의 연장을 위해서 민족 분단의 연장을 획책하는 것은 온 민족을 죽음의 구렁 속에 빠뜨리는 극악무도한 짓이노라. …지금 독립 정부의 수립이 당장에 가망 없다고 해서 단독 정부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통일 정부를 세우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해서 단독 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겠노라’는 말이다(천재교육, 비상교육).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식.


교과서와 신문이 말하는 4·19



 8종 교과서는 건국 당시 최우선 과제로 ‘친일파 청산’을 꼽았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 과제를 외면했다고 말한다.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친일파가 반공 애국 투사로 변신’(리베르스쿨)했고, ‘반민족 행위자 처벌보다 반공을 더 중요시 여긴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비상교육)로 ‘민족 정기를 바로잡는 과제가 뒤로 미뤄지게 됐다’(미래엔)고 설명한다. 교학사는 ‘경찰은 치안 유지와 공산 세력 저지의 공을 주장하며 (반민족 행위 처벌에 대해) 반발했다’고 얘기한다.



 이승만이 3대 대통령까지 연임한 사실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공 정책으로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업적과 함께 ‘민주주의의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며 장기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는 아쉬움도 드러냈다.(미래엔)



 8종 교과서 중 교학사를 제외한 7종에서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을 통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독립된 장으로 비중있게 다루며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주제를 담았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로 촉발된 4·19 혁명에 대해 ‘국민들이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저버리는 독재 정권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퇴진시킨 민주주의 혁명’이라 정의했다.



 4·19 성과를 조명한 교과서와 달리 신문에는 4·19 혁명의 그림자에 대해 주목하기도 했다. 오늘날 극심한 세대 갈등의 근원에는 4·19 혁명을 통해 ‘젊음을 떠받드는 풍조’(2014년 1월 27일자 25면 유종호 “젊음 떠받드는 사회, 세대갈등 매우 심각”)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4·19 이후 청년 학생은 도덕적 순결성, 정의의 사도의 상징처럼 숭앙돼 왔다. 하지만 ‘젊은이는 무조건 옳고, 기성 세대는 무조건 부패했다’는 식의 이분법으로 이어져 세대갈등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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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정치 이슈에 3·15와 4·19를 끼워맞추기도 한다. 야당 의원은 국정원 대선 개입을 3·15 부정선거에 비유하며 “헌정 유린, 국기 문란을 야기한 세대에 대통령이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는 내용의 서한을 배포(2013년 8월 22일자 5면 야당 “3·15 부정선거 반면교사로” 여당 “대선불복 본색”)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하야한 사실에 빗대 ‘지금 진실을 규명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그(4·19혁명과 대통령 하야)보다 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어 논란이 일었다.



글=박형수 기자

자문=중동고 최미정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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