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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레벤스라움, 지정학의 망령

문정인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푸틴의 모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러시아는 60년 전 우호의 상징으로 우크라이나에 넘겨주었던 크림반도를 전광석화처럼 되찾아왔다. 절차도 그럴듯했다. 크림자치공화국 의회의 합병결의, 뒤이은 국민투표의 압도적 지지, 끝으로 러시아 의회의 합병제의 수용이라는 수순은 영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반응은 다르다. 서방은 러시아의 행보를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자 민주주의와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다. 러시아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는 이미 시작됐다. G8로부터 축출된 러시아의 국제적 고립은 한층 심화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NATO가 한마음으로 단호한 행동에 나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서방 대 러시아’라는 대립구도가 재현되자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냉전의 부활’ 또는 ‘신냉전의 서막’이라는 분석을 쏟아냈다.

 비유는 매력적이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냉전은 미·소 양국이 핵 억지력을 바탕으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벌였던 패권 다툼이었다. 반면 최근 푸틴의 행보는 ‘레벤스라움(생존공간)’이라는 명분하에 제국의 팽창을 획책했던 나치독일식 지정학의 부활에 가까워 보인다. 이들에게 국경이란 만고불변의 획정선이 아니다.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육상통로와 해상통로, 전략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물리적·자의적으로 허물 수 있는 가변적인 선일 뿐이다.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서 내건 명분이 바로 독일계 주민 보호와 실지 회복이었다. 배후에는 유럽의 심장부를 정복해 제국 팽창의 숨통을 트겠다는 지정학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푸틴의 명분도 다를 바 없다. 크림반도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겠다는 대외적 명분은 물론, 지중해로 나가는 관문이자 흑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크림반도를 친서방 노선으로 선회하는 우크라이나에 그냥 맡겨둘 수 없었다는 속내도 꼭 닮았다. 크림반도의 막대한 석유와 가스 매장량도 변수로 작용했다. 생존공간과 지역 수준의 세력권 확보라는 국가이익 차원에서 크림을 합병한 것이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넘실대는 민족주의의 그림자다. 냉전의 본질은 이데올로기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는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주의가 훨씬 중요한 변수로 작동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세력이 ‘탈러시아, 친유럽’이라는 기치 아래 친러 정부를 무너뜨리자, 크림반도의 다수 러시아계 주민들은 러시아 민족주의로의 회귀로 맞대응했다. 여기에 푸틴 역시 러시아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하며 크림반도 합병을 정당화하는 교묘한 수를 골랐다. 지정학적 계산과 민족주의의 유혹이야말로 푸틴의 극히 모험적이고 야심만만한 행보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냉전 시기만 해도 전체주의 공산국가인 소련은 물론, 다원주의 체제인 미국에서도 국가안보 사안을 국내정치에 활용하는 사례는 드물었다. 그러나 크림사태가 악화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관련국의 국내정치적 이해관계였다. 무능하고 부패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와 실정이 우크라이나의 위기를 촉발했고, 푸틴 대통령의 개입 역시 정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국내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30%에도 미치지 못하던 그의 지지율이 공세적 행보 이후 70%를 넘어섰다는 것이 그 유력한 방증이다.

 이처럼 이번 사태는 냉전의 부활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냉전보다 더 위험하다. 우선 지정학, 민족주의, 국내정치라는 세 변수가 확대재생산하며 악순환하는 구조가 러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과 그에 따른 전쟁 참화가 채 잊혀지지 않은 아시아에서도 지정학과 민족주의의 덫이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지정학적 팽창으로 규정해 아시아 회귀 전략으로 대응하고, 아베 총리는 아예 중국의 최근 행보를 나치의 ‘레벤스라움’ 전략에 견주며 대중(對中) 포위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각국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선동적 국내정치로 인해 이러한 지정학적 대치는 더욱 예측 불가능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지정학과 민족주의, 국내정치가 맞물려 소용돌이치는 동북아의 미래 질서는 냉전 질서보다 한층 더 불안정하고 위협적일 수도 있다. 냉전식 사고에 기초한 처방이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단순히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한·일관계를 개선해 한·미·일 3국 공조를 다지는 것만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정학적 사고가 정책결정자들을 사로잡고 민족주의가 국내정치적으로 오용·남용되는 것을 막을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틀을 뛰어넘는 창의적 외교가 절실하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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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