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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임나설 정당화 노린 일본 "내물왕 이전 기록은 허구" 억지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 고대사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왜곡은 와세다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교수가 출발점이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역사, 『일본서기』 『고사기』에 나오는 고대 일왕의 기록을 근거가 없다고 비웃었다. 일본 민족의 한반도 도래설을 차단하고 지배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런 학설을 한국인 학자들도 받아들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왜인(倭人)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함께 일본 상대(고대)사를 밝힐 수 있는 사료다. ‘신라본기’의 기록을 보자.

<8> 일제가 더럽힌 우리 고대사



“왜인들이 군대를 끌고 와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뛰어난 덕이 있음을 알고 돌아갔다.”(혁거세왕 8년, 기원전 50년)



“왜인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 왕이 친히 나가서 싸우니 적이 달아나므로, 날랜 기병이 뒤쫓아 1000여 급을 베었다.”(조분왕 3년, 232).



왜인·왜병들은 신라 왕도의 금성·월성·명활성을 기습하기도 했다. 눌지왕 24년(440)에는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을 약탈해 갔는데 6월에도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은 소지왕 22년(500)까지 30여 건 나온다. 기록에 등장하는 왜인·왜병들은 소규모 도둑들이었고, 거의 잡혀 죽었다.



『일본서기』에는 스잔오존(『역주 일본서기 1』)의 신라 방문 신화가 나온다. 또 『고사기』에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도래했다고 써 있다. 이런 신화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와 교류했고 일본이 한반도 고대국가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의 진실들은 2000여 년이 지난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학자와 그들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자에 의해 왜곡됐다. 왜 그랬는가.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한국을 폐멸(廢滅)시키는 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하고 8월 29일 공표했다. 폐멸이라는 단어는 너무 과격했던지 당시 잘 쓰지 않던 병합이란 단어를 써 ‘병합조약(倂合條約)’이라고 꾸몄다.(요시노 마코토, 한철호 역,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2005) 이후 일본 식민학자들은 실증사학을 내세우며 한국사 폐멸 작업을 했다. 소위 식민사학이라 불러왔던 것인데 필자는 이를 폐멸사학이라 불러도 좋다고 본다.



이들의 대표적 죄악이 신라 내물왕(재위 356~402년) 이전의 역사에 침묵하고 은폐한 것이다. 그 역사는 신라 천년사의 5분의 2나 된다. 신라뿐 아니라 한국사에 영향을 미친 정치·사회·문화의 구조적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현재 다수의 한국인이 사용하는 종성(宗姓)과 육부성(6部姓, 김·이·박·최 등)의 시조 모두 내물왕 이전에 등장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그 시기에 들어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꼬집어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국사 폐멸을 추구하던 일본인 연구자들이 이 대목을 지나칠 리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 신라의 역사를 침묵시킨 최초의 일본인은 일본 최고의 역사가라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다. 와세다대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신연구, 1919; 『쓰다 소키치전집』(이하 『전집』) 별권 1, 1966)라는 논문에서 장황하게 신라의 기록을 짓밟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상대(고대) 부분에 왜·왜인 기사가 풍부하게 포함돼 있다. 이 중에는 『고사기』 『일본서기』와 함께 일본 상대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인 것처럼 생각된 것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상대 부분은 역사적 사실을 기재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이 점) 동방 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 사이엔 이론이 없어 왜에 관한 기록들도 마찬가지로 사료적 가치가 없다….”



그러면서 당시 유행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료를 근거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료를 비판하는’ 방법을 썼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료’로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과 그 안에 인용된 ‘위략(魏略)’을 꼽았고 그것을 최초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3세기 신라는 진한 12국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소부락이라 못 박았다. 나아가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기록 전체가 조작된 것이라 했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건국신화에 나오는 ‘조선유민’은 기자나 위만 조선계 중국인이다. 신라인에 중국인이 안 나타나는 것이 문제다.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설화이므로 믿기 어렵다.

▶3세기까지 진한의 한 소부락이었던 신라가 파사왕대(80~112)에 음즙벌국·실직국·압독국 등을 병합했다는 것은 『삼국지』 ‘한전’의 기록에 배치된다. 그러므로 영토 관계 기록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왕실 계보도 혁거세·탈해·알지의 출생 이야기는 모두 설화이지 사실이 아니다.

▶왕에 덕이 있다는 등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중국 사상의 소산으로 사실이 아니다.

▶신라의 기년과 역대 국왕의 세계(世系)도 모두 허구다.

▶그래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상대 부분 기사는 거의 공허하다.

▶4세기 후반~5세기에 걸쳐 일본(왜)이 가야를 근거로 삼아 신라와 대적했다는 명백한 사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에 관한 기사를 취할 수 없다. 이는 쓰다 소키치가 소위 임나일본부가 가야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의 배경이다.

▶실성이사금(402~417) 무렵에도 허구적 기사가 있고 이전 내물이사금(356~402) 무렵, 즉 왜병이 처음으로 신라를 압박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기사도 다른 확실한 사료의 기록과 비교할 대상이 없어 신용할 수 없다.

▶어느 나라의 상대사도 특수한 의도에 따라 조작되는 경우가 있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왼쪽), 경주에 있는 내물왕릉.


요약하면 크게 10대 주장이다.



그런데 쓰다의 ‘신라본기’에 대한 비판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가 ‘믿을 수 있다’고 여긴 『삼국지』 ‘위서 한전’은 일종의 인문지리서일 뿐 신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할 만한 자료가 아니다. 사료 비판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쓰다가 그렇게 한 데는 목적이 있다. 내물왕 이전 기록을 사료로 인정하면 신라는 1세기 중반~3세기 중반까지 현재 경상북도 일대를 정복한 왕국이 된다. 그런데 그런 사실(史實)이 쓰다에겐 유감이다. 내물왕 이전·이후 왜는 신라에 비교할 수 없는 약한 세력이었고 그러면 임나일본부설은 성립할 수 없다. 이에 신라의 성장을 은폐하기 위해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기록을 조작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쓰다의 주장에 영향받은 한국 연구자 때문에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불신받고, 『삼국지』 ‘위서 한전’을 근거로 삼한론이 펼쳐져 왔다. 필자는 두 사서를 모두 중요한 사서로 이용해 왔다. 서로 다른 면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둘을 종합하면 역사는 한 권만 볼 때보다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여전히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쓰다 소키치는 어떤 역사가였을까. 세키네 히데유키(關根英行)의 ‘쓰다사학(津田史學)의 신대사(神代史·고대사) 해석과 한·일 민족의 계통관계’(일본사상 12, 2007)를 보면 몇 가지 특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쓰다는 황국사관에 강력히 맞선 연구자처럼 돼 있지만 실제론 “…황실과 국민은 본래 일체이며 멀리 떨어진 대립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뼈와 살처럼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본래 끊을 수 없는 관계, 끊어서는 안 되는 관계이며 그러므로 만세일계다”(『전집』 별권 1, 2)라는 말을 했다. 황국사관으로 천황제를 옹호한 것이다.



둘째, 쓰다는 “4~6세기 한반도와 이에 연결된 대륙의 민족 할거의 형세 때문에 어느 민족도 바다 건너 일본으로 진격해 온 적이 없다”(『전집』 3권)고 했다. 일본의 단일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단절시키는 역사를 만들었다.



셋째,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제1대 진무천황(神武天皇·기원전 660~585)에서 추아이천황(仲哀天皇·기원후 192~200)까지의 고대사나 초기천황 기사에서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고 다만 고대인의 사상을 밝히는 데만 의미가 있다고 했다. 소위 ‘쓰다사학’으로 학계에 수용돼 일본 정복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도래설’의 근거를 차단한 것이다.



결국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의 왜·왜인 관계 기록, 나아가 그 전체 기록을 조작된 것이라고 외면하는 것은 일왕(천황)제를 옹호하고 일본 민족의 한반도 도래설을 차단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물왕 이전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한국인의 역사인식을 말살의 길로 끌고 갔다. 첫째, 일선동조론을 도왔다. 그는 일선동조론을 부정했지만 한국인의 신라 오리진에 대한 역사를 잘라냄으로써 일선동조론을 펼 바탕을 마련했다. 둘째, 창씨개명을 도왔다. 일본은 1940년 2월 11일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국인이 강력하게 유지해온 부계나 종족 의식을 파괴하고 일본의 가(家)를 단위로 한 씨(氏)를 만들어 천황제의 가족들로 편제시킨 것이다.(요시노 마코토 지음, 한철호 옮김, 앞의 책)



역사가의 조그만 논문 하나가 큰 후과를 초래했다. 쓰다가 침묵을 강요했던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는 ‘오리의 각인’이 돼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삼한론의 문제 그리고 한국인에게 특별한 역사인 내물왕 이전 역사는 다음 편에 언급한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이종욱 교수 leejw@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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