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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100년간 사람 오가면 통일 저절로 된다”

대륙 친지 방문이 허락되자 신청 방법을 문의하기 위해 몰려든 대륙 출신 퇴역군인들. 1987년 11월 타이베이 소재 중화민국 적십자 본부. [사진 김명호]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혁명정당으로 출발했다. 두 번에 걸친 합작도 북양군벌 타도와 항일전쟁 수행이라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다. 통일 문제도 3류 건달들처럼 굴지 않았다. 골방에서 쑥덕거리다, 하루아침에 연합이니 뭐니 하며, 같지도 않은 말장난으로 국민들을 우롱하진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67>

1세대 지도자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성격부터가 판이했다. 장제스는 선제 공격을 퍼부은 후에 평화적 해결을 제의했다. 마오쩌둥은 정반대였다. 항상 평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전쟁을 준비했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와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유사한 점이 많았다. 1973년 타이완의 장제스는 중요 업무를 장징궈에게 이관했다. 대륙의 마오쩌둥도 병중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대신하기 위해 지방에 쫓겨가 있던 덩샤오핑을 베이징으로 불러 올렸다. 총리 저우언라이는 정계에 복귀한 덩샤오핑에게 그간 자신이 행사하던 권한을 넘겼다. 타이완의 대권을 장악한 장징궈는 옛 친구 덩샤오핑을 주시했다.

덩샤오핑의 첫 번째 발언은 양안관계였다. “베이징 측은 타이베이와 통일 문제를 직접 담판할 준비가 돼 있다. 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안의 평화다.” 이어 문혁(文革) 시절 없어졌던 군 계급을 부활시키고 정비했다. “계급도 평화시대에 걸맞아야 한다. 대장 계급을 없애버려라. 평화시대에 대장은 무슨 놈에 대장, 만에 하나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그때 달아주면 된다.”

병상의 장제스는 덩샤오핑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장징궈의 생각도 같았다.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입장을 확고히 했다. “중국 공산당과의 접촉이나 담판은 자살행위다. 저들은 항상 평화를 내세우며 뒤로는 딴짓을 해댔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1975년 장제스가 세상을 떠났다. 덩샤오핑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항일전쟁 시절 우리의 지도자, 장제스 선생이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애도를 표한다. 유족들이 원하면 난징에 묘지를 조성하겠다.”

1978년 3월 장징궈가 총통에 취임했다. 2년 전 봄에 또 쫓겨났던 덩샤오핑도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그게 그거”라며 개혁·개방을 천명한 후 타이완의 장징궈에게 우호 메시지를 날렸다. 그간 해마다 해오던 ‘2·28(二·二八) 사건’ 기념행사를 없애버렸다. 2·28 사건은 1947년 2월 28일 별것도 아닌 사건을 빌미로 국민당이 타이완 토착세력의 씨를 말려버리다시피 한 사건이었다.

덩샤오핑은 장징궈의 효성이 남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도량이 큰 사람답게 꾀도 많았다. 장징궈의 고향인 저장(浙江)성 시커우(溪口)에 측근을 파견했다. “그곳에 있는 장징궈의 모친과 조모의 분묘를 잘 보수해라. 역대 조상들의 묘지도 깔끔히 다듬어야 한다. 완성되면 사진을 보내라.” 덩샤오핑은 비밀리에 사진을 타이완의 총통부로 보냈다.

중공 신임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은 공개적으로 장징궈와 국민당 관원들을 초청했다. “고향의 옛집과 산천이 그리운 사람들의 조국 방문을 환영한다. 언제든지 와라.”

대륙의 변화를 감지한 장징궈는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1985년 75세에 들어서자 국민당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과 언론 통제를 느슨히 하기 시작했다. 반정부 인사들은 잡혀가고도 남을 짓을 했지만 잡으러 오는 사람이 없자 무슨 일인지 갈피를 못 잡았다. 같은 해 9월 81세의 덩샤오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타이완 문제는 여전히 직접 챙겼다.

덩샤오핑은 싱가포르 지도자 리콴유(李光耀·이광요)를 중간에 내세웠다. 리콴유는 오래전부터 베이징과 타이베이를 자주 오갔다. 리콴유가 베이징에 올 때마다 장징궈의 안부를 물었다. 리콴유도 덩샤오핑과 대륙의 관원들에게 타이완의 정세를 상세히 설명했다. 덩샤오핑이 “1개의 중국이라는 원칙 외에 대륙 측에서는 특별한 조건이 없다. 다른 자질구레한 것들은 만나서 얘기하면 된다. 100년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면 통일은 저절로 된다”고 하면 리콴유는 타이완의 장징궈에게 달려가곤 했다.

‘대륙방문금지령’ 철폐 2개월 전 정부 허가 없이 대륙 취재에 나선 타이완 자립만보(自立晩報) 기자 쉬루(徐璐)와 리융더(李永得). 두 사람의 대륙행은 금지령 철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7년 9월 14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
시간이 흐르자 장징궈도 리콴유를 통해 대륙 측에 확답을 보냈다. “타이완의 정치체제부터 바꿔야 한다. 그간 계획을 수립하고 방법을 구상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1986년 9월 민주진보당이 창당 선언을 했다. 당시의 법규대로라면 범법 행위였지만 장징궈는 체포령을 내리지 않았다. 당장 해체시켜야 한다며 길길이 뛰는 당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도 변했다. 그간 국민당은 너무 오만하고 자신감만 넘쳤다. 당장 지금부터라도 변해야 한다. 공산당도 예전의 중공이 아니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통일의 길로 나가야 한다. 타이완과 대륙은 통일이 돼야 한다. 통일이 되지 않으면 타이완은 점점 고립된다.”

이듬해 11월 장징궈는 “민족의 죄인이 될 수 없다”며 40년간 유지된 대륙여행 금지령을 폐지시켰다. “걱정할 것 없다. 타이완인들에게 대륙의 정세를 이해시켜라. 대륙 인민들에게도 타이완의 실정을 알리도록 해라.”

1988년 1월 13일 장징궈가 급서했다. 덩샤오핑은 한숨만 내쉬며 애통해했다. “너무 일찍 죽었다. 장징궈가 건재했더라면 3차 국·공합작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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