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쓴 부고에 "그는 모든 면서 운 좋은 사람"
변호사·정치인·범죄자 명품 조연
"가족은 필요한 만큼만 슬퍼하길"
‘짐(Jim, 레브혼의 애칭)이 말하는 그의 삶’이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는 다음과 같다. 그는 스스로 제3자가 되어 평생을 바친 배우라는 업과 가족에 대해 변함없는 애정을 표시했다.
1948년 9월 1일, 레브혼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제임스 H 레브혼과 아델 레브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독일계 미국인 가정은 아들에게 정중함의 가치와 신앙심을 가르치고 그가 ‘배우’라는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격려했다. 아내 레베카와 두 딸 엠마, 한나는 그가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레브혼은 “그들 없는 그의 삶은 한낱 수증기(vapor)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죽음 뒤에 남겨질 가족들을 걱정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자신의 죽음을 딱 필요한 만큼만 슬퍼해주길 바란다”고 썼다. 왜냐하면 “그들은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이 있고, 세월은 흘러가기 마련(Time is flying by)”이기 때문이다.
그는 ‘연기’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기를 하면서 밥벌이를 할 수 있어 행운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배우의 길로 이끌었던 은사들과 동료에 대한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커리어를 쌓을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레브혼은 사실 ‘조연’ 전문 배우였다. 큰 키에 인자하지만 냉철한 인상 때문에 주로 변호사·정치인 또는 범죄자 역할을 맡아왔다. 70년대 초반 연극계에서 경험을 쌓고 영화계와 TV로 진출했다. 대표작으로 영화 ‘여인의 향기’(1992)에서 주인공 알 파치노와 대립각을 세우는 사립학교 교장 역을 맡았다. 최근까지 미국 캐치온의 드라마 ‘홈랜드’(2011~2013)에서 주인공 클레어 데인즈의 아버지로 열연했다.
레브혼의 매니저 다이앤 부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스스로 자신의 부고를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한다. 레브혼은 이름보다 얼굴이 더 알려진 조연으로 살았지만 자신의 가족과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할 줄 알았으니 진정 ‘운 좋은 사나이’였다.
외국에서 레브혼 같이 자신의 부고를 직접 작성하는 배우는 드물다. 하지만 일부 기자나 작가들이 스스로 부고 기사를 남기거나 묘비명을 짓기도 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아흔넷에 죽기 전 남긴 “내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 생길 줄 알았다니까(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는 묘비명이 유명하다.
위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