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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압구정 전당포의 비밀



네, 이곳은 지금도 영업하고 있는 압구정동의 한 전당포입니다. 주인 아저씨가 고객이 맡긴 시계가 진짜인지 들여다보고 있네요. 부자가 모여산다는 동네, 게다가 한류(韓流) 스타가 들락거리는 최첨단 유행거리에 전당포라니 ….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압구정동(신사동)이 서울에서 전당포가 가장 많은 지역이랍니다. 대체 무슨 비밀이 숨어있는 걸까요.

서울 전당포 5곳 중 1곳 지난해 새로 생겨
압구정동에만 10곳 등 강남구에 가장 많아
담보로 맡길 고가품 소유자 몰리기 때문
신용등급 영향 없다는 것도 장점으로 부각





현재에서 맞닥뜨린 과거, 전당포



시간이 멈춘듯 했다. 아니, 타임슬립(미끄러지듯 시간여행하는 것)으로 수십년 전 어느 날로 돌아왔나, 하고 순간 착각할 정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1평(3.3㎡) 남짓한 좁은 공간 바로 앞에 쇠창살과 투명 플라스틱판으로 가로 막힌 벽이 하나 있었다. 벽 너머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한가운데 뚫린 얼굴 크기만한 구멍이 전부. 벽에 붙은 손글씨로 된 안내문들을 읽었더니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처럼 모든 게 더 어리둥절해졌다. ‘한 업소에서 26년간 영업중. 서울에서 가장 싼 이자.’ ‘장물을 가지고 오면 즉시 경찰에 신고합니다. 가짜시계 사절. 모이사나이트(합성보석) 가지고 오면 즉시 경찰에 신고합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빛바랜 종이 위에 씌어있는 이 문구는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은 2014년, 그것도 트렌드를 주도하는 부촌(富村) 압구정동(행정구역상 신사동) 한복판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아, 이곳은 강남구에만 23개 있다는 전당포 중 하나다.



머리 속에서 상상만 하던 ‘그때 그시절’ 모습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알고 보니 벽 한쪽에 붙은, 역시 쇠창살과 투명 플라스틱판으로 된 출입문을 열고 저 너머 공간에서 이쪽 세계로 넘어온 전당포 주인장이었다.



운영자 전모(54)씨는 “20~30년 전에나 있을법한 가게 모습을 아직 유지하는 건 손님들 때문”이라며 “이래야 진짜 전당포라고 믿고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맞다. 이곳은 전당포다. 강남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겨난 중고 명품숍이 아니라, 바로 그 원조 전당포 말이다.



전당포는 20~30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금융회사 문턱이 높은 서민들이 급전(急錢)이 필요할 때면 아끼던 귀중품을 맡기고 돈을 빌리곤 했다. 그러다 어느새인가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뭔가 이색적인 장소가 됐다. 시대가 변했으니까. 금융회사 종류는 다양해졌고, 전화만 걸면 묻지도 않고 돈을 빌려준다는 대부업체 광고가 하루종일 TV에 나올 만큼 돈 구할 데는 많아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전당포 수가 급격히 늘어난 거다. 한국대부금융협회에 따르면 대부업 등록업체 중 업체명에 ‘전당’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곳만 서울에 240곳(3월 7일 기준)이다. 이 중 54군데가 지난해 신규 등록한 업체다. 서울 전당포 너댓 곳 중 하나는 지난해 새로 문을 연 곳이라는 얘기다.



전국 대부업 등록교육 이수자 수를 봐도 이런 추세를 알 수 있다. 대부업이나 대부중개업을 등록, 또는 등록 갱신 하려면 대부금융협회에서 반드시 일정 교육을 받아야 한다. 지난해 전당포 영업을 위해 교육을 받은 이수자는 806명이었다. 2012년(562명)에 비해 43.4%나 증가한 수치다. 이재선 한국대부금융협회 사무국장은 “사실상 전당포로 운영하면서도 업체명을 ‘전당포’라고 등록하지 않은 곳도 있기 때문에 실제 전당포 수는 더 많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전당포가 늘고 있다고?



전당포는 사업구조상 사양업종일 수 밖에 없지만 특히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일본계 대부업체가 한국 사채시장을 급속도로 잠식한 게 한 이유다. 두둑한 자금으로 무장한 일본계 대부업체들은 제도권 금융이라는 포장에, 당시의 사채금리보다는 파격적으로 싼 대출이자(※그래도 역시 은행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높다)로 서민 고객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고객 입장에선 값도 값이지만 추억이 서린 결혼 예물 등 소중한 귀중품을 담보로 내놓지 않아도 되니 대부업체로 자연스레 발길을 옮긴 거다.



김대중 정부 시절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도 전당포에겐 타격이었다. 비록 나중에 카드대란으로 이어져 한국경제를 휘청이게 하긴 했지만 당시엔 누구나 쉽게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소액을 융통할 수 있게 되면서 전당포 갈 일이 더 없어졌다. 시간이 더 흐르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 지난해 전당포가 늘어났다. 전당포 업계에선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국내 경기가 급속히 얼어붙었고, 이게 전당포로 다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미 대부업 시장을 몇몇 대형 대부업체가 나눠갖고 있는 상황에서 소규모 대부업체와 사채업자들이 ‘개인 신용’과 무관하게 ‘현물’이 오가는 전당포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거다. 담보를 잡고 있으니 돈 떼일 걱정이 적다는 게 장점으로 부각된 셈이다.



1년6개월 전 문을 열었다는 한 전당포 운영자도 “경기가 워낙 어려워 다들 돈이 없다”며 “그래도 현물이 오가니 비교적 안전하다는 생각에 전당포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런 관심을 타고 지난해는 ‘3000만~5000만원만 있으면 전당포 문을 열 수 있다’며 전당포 체인을 모집하는 업체도 있었다. 한 전당포 체인점주는 “점주를 10여 명 모집해 전국적으로 점포를 열었다”며 “전당포에 관심있던 사람들이 지난해에 많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고객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다. 가계대출 1000조원 시대라지만 섣불리 대부업체 문을 두들였다 신용등급이라도 낮아지면 큰일이다. 그런데 전당포는 급전을 쓰면서도 신용등급 하락 걱정을 할 필요 없으니 한결 마음이 편한 거다.



왜 압구정동에 많을까



전당포는 서울에만 240곳 있다. 특히 강남구에 25개 자치구 중 가장 많은 23곳이 몰려있다. 게다가 강남구 전당포의 절반(10곳)은 또 압구정동(신사동)에 있다.



서울에서도 부자 동네로 불리는 강남구에 소액 대출이 주 업무인 전당포가 왜 많을까. 전당포 운영자들은 ‘다양한 고객층’때문으로 설명했다. 한 운영자는 “물론 여기서도 10만원을 빌려가는 고객도 있지만 가끔 몇 캐럿짜리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맡기고 1000만원을 빌려가는 고객도 있는 곳이 강남”이라면서 “5년간 강동구에서 전당포 하다 이쪽으로 온 이유”라고 말했다.



또 다른 운영자는 “강 건너 온 보석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급전이 필요한 종로 보석상이 안 팔린 보석을 들고 강남 전당포를 찾는다”며 “그 바닥에서 (전당포 다닌다고) 소문나면 장사할 수 없기 때문에 굳이 강남 전당포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압구정동에 전당포가 몰려있을까. 한 중고 명품숍 운영자는 “전당포에 맡길만한 물건(명품)을 가진 사람이 많은 곳이니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갤러리아·현대 백화점과 청담동 럭셔리 패션 브랜드 매장이 붙어 있으니 고가(高價) 사치품을 사려는 사람이 몰릴테고, 그러니 이미 산 물건을 맡길 수 있는 전당포나 중고명품점도 많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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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엔 소니TV, 이젠 휴대폰 맡겨



전당포는 과거 돈 급한 서민의 유용한 금융업체였다. 전씨는 “1980년대 후반만 해도 TV·전축·VCR 같은 가전제품을 맡기는 고객이 많았다”며 “평면TV가 나오기 전이라 무거운 브라운관 TV를 3층 가게까지 낑낑거리며 들고 올라오는 손님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만해도 일본 제품이 귀하던 시절이라 소니(SONY) 전축이나 VCR을 최고로 쳐줬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어떨까. 전당포의 스테디셀러는 그때나 지금이나 금·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류다. 한 전당포 운영자는 “지금도 금·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을 맡기는 고객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하듯 이 전당포 벽면에 붙은 화이트보드엔 금과 다이아몬드 시세가 써 있었다. 하지만 이젠 가전제품 맡기는 사람은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명품 가방·시계다. 한 전당포 간판의 대출품목에도 귀금속과 함께 명품 시계와 가방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



아예 휴대폰 등 정보기술(IT) 기기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전당포도 있다. 한상준(40) 홍대아이티전당포 대표는 “가장 많이 맡기는 품목은 노트북”이라며 “인터넷 중고사이트에서 거래되는 가격의 70%까지 대출해주는데, 보통 30만~40만원선”이라고 밝혔다. 한 대표는 “5·15·25일 같은 신용카드 결제일이면 유독 손님이 많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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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고객도 많아



고객이 맡기는 품목이 달라졌다는 건 전당포를 찾는 고객층도 달라졌다는 걸 의미한다. 대학생 고객도 적지 않다.



지난 11일 찾은 마포구 동교동의 한 전당포도 그런 곳이었다. 압구정동 전당포와 달리 이곳은 푹신한 소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쇠창살 대신 은행 창구 같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이곳도 평균 30만~50만원 소액대출을 해주는 건 기존 전당포와 같다. 다만 고객층이 좀 더 젊다. 김영완(31) 착한전당포 홍대점 대표는 “주 고객층은 20대 중반~30대”라며 “홍대 근처라는 지역 특성상 작가·미술에 종사하는 프리랜서가 많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사실 전당포가 늘어나는 건 각박한 요즘 사회 세태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단돈 몇 십만원도 친구·지인에겐 빌려달라고 하기 어려운 게 요즘 분위기다보니 너도나도 전당포를 찾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주고객은 역시 30~40대다. 지출이 크게 느는 시기인데 정작 주머니는 두껍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30대는 이미 보석이나 명품 등을 많이 갖고 있어 전당포에 맡길 물건이 많다는 것도 한 이유다. 40대는 자녀 사교육 문제로 일주일이나 한달쯤 비교적 단기간에 적은 돈이 필요해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전씨는 “많이 빌려야 100만원이고 평균 30만~50만원선”이라며 “소규모 자영업하는 사람이나 월급 밀린 중소기업 직원이 1~3개월, 짧게는 하루 이자만 내고 그날 빌렸다가 하루만에 찾아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밝지 않은 미래



늘어나는 전당포, 과연 미래는 밝을까. 별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대다수 전당포 운영자들은 “손님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 운영자는 “지금이 오후 5시인데 그 쪽(기자)이 오늘 가게에 들어온 첫 손님”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한상준 대표도 “지난해만 해도 홍대·신촌 일대에 10여개가 넘는 전당포가 있었지만 올해부터 하나 둘씩 문을 닫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당포는 자본금이 최소 2억원은 필요한데 3000만~5000만원 정도의 적은 돈을 갖고 시작하면 손님이 와도 빌려줄 돈이 없어 수익을 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적은 비용으로 창업이 가능하다고 무모하게 문을 열었다가 망하는 거다.



현재 전당포에서 받을 수 있는 법정(대부업) 최고 이자는 월 3.25%(연 39%)다. 고객이 100만원을 빌리면 한 달에 이자를 3만2500원 내야 한다. 다음달 2일부터는 연 34.9%로 이자가 더 떨어진다. 하루에 손님 한두명 받아서는 운영하기 어려운 수익 구조다.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요인은 하나 더 있다. 신용카드나 신용대부업체 말고도 전당포 역할을 하는 업체가 계속 는다는 점이다.



지난 6일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근처. 목 좋은 자리엔 어김없이 ‘중고명품’ 간판을 건 가게가 있었다. 나란히 붙어 있거나 1·2층이 모두 중고명품점인 곳도 있었다. 압구정로데오 거리 안쪽에서도 중고명품점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가게를 단순히 명품 중고 핸드백을 사고 파는 곳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물건을 담보로 대출도 해준다. 전당포 역할이나 똑같은 거다. 14년 동안 중고명품점을 운영한 김모(46)씨는 “우리는 일반 매장이랑 비슷해 (전당포와 달리) 30~40대 여성들이 거부감 없이 오기 좋다”며 “대출 받으러 왔다가 또 다른 중고 명품을 구입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글=안혜리, 조한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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