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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패러디 파라다이스] ‘악’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편

그래. 오늘은 청소를 해요. 창을 모두 열고 먼지를 털고 방과 거실을 청소기로 밀고 걸레로 닦을게. 책장도 정리하고 베란다도 치울게. 재활용 쓰레기도 분리하고 욕실 청소도 할게. 만일 당신이 장 보러 간다면 그것도 좋아. 웃으며 따라갈게.

나도 알아. 당신이 깨끗한 것, 정리된 것, 밝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집이 어질러져 있으면 당신 마음도 어지럽고 창에 먼지가 있으면 당신 기분도 우울하다는 것을. 그러니 그것을 정리하고 닦을게. 불 나간 전등도 갈게. 나중에. 지금은 말고. 나중에 그것들을 내가 다 할게.

지금은 고귀한 일을 하고 싶어.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계속 읽는 것. 고전이란 처음 읽으면서도 다시 읽는다고 말하게 되는 책이라더니. 다시 읽어도 셰익스피어는 좋아. 이 대목 말이야.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고귀한 삶을 꿈꾸는 일은 사치겠지. 가령 ‘저녁이 있는 삶’ 같은 것을. 밤 8시 넘어 퇴근해 집에 오면 9시가 넘고 밥 먹고 설거지 하고 나면 10시가 넘는 고단한 현실에서는. 그래도 ‘일요일이 있는 삶’을 꿈꿀 수는 있잖아. 주중엔 매일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늦게까지 일했으니 일요일 하루는 눈치 보지 않고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여보, 일요일은 휴일이야. 쉬는 날이라고. 휴일에도 쉬지 않고 뭔가를 해야 한다면 누가 살 수 있겠어?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 흘릴까?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 받는 사랑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 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그건 적어도 일주일 중 하루는 휴일이 있기 때문이야. 성스러운 휴식의 날. 휴식할 때 인간은 비로소 성스러워지는 거야. 천지창조를 한 하느님도 일곱 번째 날엔 쉬었다고 하잖아.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일들을 내가 하려고 마음먹었어. 정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당신이 시키니까 이제 내 손은 일할 의욕도 흥미도 잃어버렸어. 할 일 없는 손의 감각이 더 예민한 법이니까.

아, 당신은 잔소리로 날 조종하려 들어. 당신에겐 통제욕구가 있는 것 같아. 당신은 날 연주하고 싶지? 당신은 날 피리보다 더 쉽게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를 무슨 악기라고 불러도 좋아. 허나, 나를 만지작거릴 순 있어도 연주할 순 없어. 당신이 그런 눈빛으로 보면 난 쉴 수가 없어. 여보, 난 쉬고 싶어. 정말이지 내겐 휴식이 필요해요. 지난달 건강검진 받았을 때 의사가 말했다니까.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라고. 술을 줄이고 물을 많이 마시라고. 무엇보다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다고. 그것도 지금 당장!

당신은 날 비난하는가? 게으른 사람이라고. 미루기만 하는 남자라고. 행동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결국 아픈 아내가 청소할 때까지 책이나 읽고 있는 이기적이고 한심한 작자라고. 아, 너무나 진실이다. 그 말은 내 양심에 얼마나 아픈 채찍인가. 당신은 항상 옳은 말을 너무나 잘 하니까 나는 이렇게 외치는 거야. 속으로만. 가슴아 터져라, 입은 닫아야 하니까. 남은 건 침묵일 뿐.

** 컬러 부분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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