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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화해의 상징' 베를린으로 가는 지도자들



독일 베를린은 소련의 전차와 미국·영국·프랑스의 탱크가 마주 보고 대립하던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냉전시대는 종언을 고했고, 이제 그 자리엔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분단의 증거이자 통일의 증거, 갈등의 상징이자 화해의 상징인 도시.

케네디 "난 베를린 시민이다" 이념 장벽 붕괴 내다봐
김대중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석 달 뒤 정상회담 성사



 수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연설과 선언의 발표 장소로 베를린을 택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은 냉전시대의 정점이던 63년 베를린 연설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수호를 역설했다. 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 건설을 시작한 지 22개월 만이었다. 6월 26일 슈네베르크 시청 앞에 마련된 연단에서 케네디는 ‘베를린에서의 어느 하루’라는 제목의 연설을 시작했다.



 “공산주의가 미래의 물결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베를린에 오게 하십시오. 공산주의가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준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베를린에 오게 하십시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5주 뒤인 1989년 12월 19일 당시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 동독 드레스덴의 성모교회에서 강력한 통일 의지를 천명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케네디는 “베를린 장벽이야말로 공산주의 체제의 가장 명백한 실패를 뜻한다”고 비판을 이어갔다. “마침내 이곳에 평화가 깃드는 날이 온다면, 베를린 시민은 바로 이를 쟁취하기 위한 최전선에 있었다는 사실에 순수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모든 자유인은 그 어디에 있든 베를린 시민이다. 나 또한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베를린 시민(Ich bin ein Berliner)’이라 말하는 것이 자랑스럽다”며 연설을 마쳤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밝힌 서베를린 사수 의지에 서독인들은 열광했다. 거대한 장벽이 들어선 이후 서베를린 시민들은 언제 소련군에 점령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당시 운집한 45만 명의 군중은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분명한 차이, 그로 인한 독일 전체의 아픔을 지적한 케네디의 연설은 서독인들의 마음속에 통일에 대한 열망과 용기를 싹틔웠다.



 또 다른 미국 대통령의 명연설 역시 베를린에서 나왔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87년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한 연설이다. 당시 동독에서는 이미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85년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놨다. 이는 곧바로 동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레이건은 베를린 장벽에서 불과 90여m 떨어진 곳에 세워진 단상에 올랐다. 그는 “이 장벽의 그늘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희망과 승리의 메시지를 찾았기에 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이 일궈낸 눈부신 경제성장을 강조하며 “50년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를 묻어버리겠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서방세계에서 인류 역사상 본 적 없는 번영의 성취를 목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이어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진정 평화와 자유를 추구한다면 이 문을 열고, 이 장벽을 허물어 버리시오(tear down this wall).” 장벽을 허물라는 표현은 ‘냉전시대 종료의 시작’을 예고하는 상징적 문장이었다.



 당초 미 국무부와 국가안보국(NSA)은 이 문장을 연설에서 빼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력을 폄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표현 자체가 너무 도발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레이건이 고집했다. 레이건의 비서실장이었던 케네스 듀버스타인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연설장으로 가는 리무진 안에서 연설문을 읽다 문제의 문장이 나오자 대통령이 나를 쳐다보고 ‘아마 국무부 애들이 미쳐버리겠지만, 난 이 문장을 고수할 거야’라고 했다.” 레이건은 나중에 회고록을 통해 “우리와 소련의 관계가 나아졌다는 것이 진실을 부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베를린에서 두 차례 연설했다. 처음은 대선 후보였던 2008년이었고, 두 번째는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난해였다. 오바마는 베를린 도심의 대형 공원 티에르가르텐에서 “대서양 양편에 있는 오랜 동맹국들 사이에 벽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며 “유럽과 미국이 하나가 되자”고 역설했다. 또 “나는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베를린에 왔다”며 “과거 공산주의를 정복했던 정신을 되살려 이제 핵 확산, 지구 온난화, 빈곤 등 세계가 공동으로 직면한 도전에 함께 대응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오바마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든 인파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오바마는 당초 브란덴부르크 문에서의 연설을 원했지만, 대선 후보 정도의 신분으로 통독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에 서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는 안팎의 의견 때문에 인접한 티에르가르텐으로 연설 장소를 바꿨다. 오바마가 소원을 푼 것은 두 번째 베를린 연설 때였다. 오바마는 지난해 6월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에서 세계 핵탄두의 3분의 1을 감축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놨다. 세계 핵탄두 보유량을 냉전 이전인 50년대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새로운 평화 프레임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실질적 후속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3월 베를린을 찾아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통일을 위한 협력을 선언했다. 이른바 ‘베를린 선언’이다. 김 전 대통령은 3월 9일 베를린 자유대학 연설에서 “당장 통일을 추구하기보다 남북한이 화해·협력하면서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이라며 “우리는 북한과의 전쟁을 결코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 극복을 위해선 민간을 넘어 정부 당국의 협력이 필요하며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정신으로 힘이 닿는 대로 북한을 도울 것이고 ▶대신 북한은 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응해야 하며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위해 북한은 우리의 특사 교환 제의를 수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틀 뒤 귀국 보고에서도 “베를린 선언은 한마디로 북한에 대해 ‘우리는 북한을 흡수통일하거나 해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안심하고 협력해 나가자’고 제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전쟁을 안 하고 북한이 계속해서 개방해 나간다면,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 통일은 안 되지만 냉전은 종식된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6월 역사적인 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베를린 선언은 남북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치밀한 사전 준비과정이었다. 청와대는 베를린 선언 발표 전 판문점을 통해 미리 연설 요지를 북쪽에 알리며 진지한 제의라고 강조했다. 연설 전날에는 싱가포르에서 남북이 비밀리에 만났다. 북한의 반응도 재빨랐다. 북한의 요청으로 선언을 한 지 8일 만인 3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남북이 접촉했고, 23일에는 베이징에서 만남을 이어갔다. 그리고 베를린 선언 꼭 한 달 만인 4월 8일 남북은 지구촌을 놀라게 한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소식을 발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앞서 김영삼 전 대통령도 95년 3월 7일 베를린에서 대북 제의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동·서독 통일조약이 조인된 역사적 장소인 황태자궁에서 독일 외교3단체 초청 연설을 통해 “북한이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도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곡물을 비롯해 북한에 필요한 원료와 물자를 장기저리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역사의 힘은 한반도 통일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2011년 5월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핵 포기에 합의한다면 이듬해 서울에서 열리는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초청하겠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할 예정인 드레스덴에서도 통일과 관련한 역사적 연설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인 89년 12월 헬무트 콜 총리는 드레스덴 성모교회 연설에서 적극적이고 조속한 통일 의지를 밝혔다. 장벽이 무너진 뒤 독일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통일 추진을 천명한 것은 이 연설이 처음이었다.



 콜 총리는 “역사적인 순간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나의 목표는 한결같이 우리 민족의 통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드레스덴 방문을 이렇게 돌아봤다. “동독에 발 디디는 순간 통일이 오고 있음을 느꼈다. 내 앞에 선 군중은 이미 통일된 독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설이 끝난 뒤 알았다.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됐고, 우리는 통일을 해내고야 말 것이라고.”



유지혜 기자



박근혜 대통령 방문하는 브란덴부르크 문은 …



25일부터 독일을 방문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베를린의 중심가 파리저 광장에 있는 이 문은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다. 세계 지도자들도 ‘하나 된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방문하거나 그 앞에서 연설하기를 원한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18세기 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지시로 건축됐다. 베를린시의 관문 중 하나이자 새로운 강대국 프러시아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개선문이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정문을 본떠 여섯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문 위는 승리의 여신이 탄 전차를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콰드리가’(사두마차)로 장식했다.



 1806년에는 이 콰드리가가 수모를 당했다. 베를린을 점령한 나폴레옹이 콰드리가만 떼어 파리로 가져가버렸다. 1814년 나폴레옹이 프러시아군에 패배할 때까지 콰드리가는 창고 속에 처박혀 있었다 . 베를린으로 돌아온 콰드리가는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프러시아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철십자가를 여신에게 쥐여줬다. 서독과 동독이 갈라졌을 때 공산주의 정권이 이 십자가를 제거하지만 1990년 통일 후 복원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에 있어 영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뒤 횃불을 밝힌 친위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한 것은 나치 정권의 대표적 선전행위로 기록돼 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자 위치상으로 동베를린에 속한 브란덴부르크 문도 굳게 닫혔다. 문 바로 앞을 장벽이 가로질러 멀리선 문의 윗부분에 있는 콰드리가밖에 볼 수 없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은 1980년 “브란덴부르크 문이 닫혀 있는 이상 독일 문제는 미결의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9년 장벽 붕괴 후 헬무트 콜 당시 총리는 동베를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이 문을 지나갔다. 독일 통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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