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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투어·멘키스, 이 둘 앉아야 패션쇼 열린다

2012년 2월 런던에서 열린 ‘멀버리’의 가을·겨울 패션쇼 맨 앞줄에 애나 윈투어(왼쪽 넷째)와 수지 멘키스(왼쪽 아홉째)가 앉아 있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이달 초 프랑스 파리에서 전해진 사진 한 장이 세계 패션계를 놀라게 했다. 2일(현지시간) 유명 브랜드 ‘발렌티노’가 올 가을·겨울 의상을 선보인 패션쇼 객석 사진이었다.

세계 패션계 파워 피플



화제의 주인공은 패션잡지 보그 미국판 편집장 애나 윈투어(65)였다. 지정석이다시피 한 객석 맨 앞줄 중앙자리 대신 둘째 줄에 앉은 그의 모습을 두고 호사가들은 “발렌티노 쪽이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다”고 수군댔다. 애나 윈투어는 누구며 왜 그의 자릴 갖고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강승민 기자



애나 윈투어(左), 수지 멘키스(右)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영국 런던에선 해마다 두 번씩 패션쇼가 열린다. 내로라하는 유명 브랜드·디자이너가 봄·여름용, 가을·겨울용 의상을 처음 선뵈는 행사다. 전 세계 패션 관계자 중에서도 초대장을 쥔 이들만 쇼장에 들어갈 수 있다. 큰 패션쇼장은 1000여 석 규모, 맨 앞줄은 100석 안팎이다. 세계 패션계에서 힘 좀 쓴다 하는 사람 1000여 명 중 10%에게만 맨 앞줄이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맨 앞줄, 영어로 ‘프런트 로(front row)’가 세계 패션 권력자들 차지라는 얘기다.



 소동의 당사자 애나 윈투어는 패션잡지 보그 미국판(이하 보그US) 편집장이다. 미국 발행부수공사기구(AAM)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월간지 보그US는 발행부수 124만 부, 열독자 수 1232만 명이다. 세계 최대 패션시장 미국에서 패션전문 잡지로는 최대 규모다.



25년째 보그US를 이끌고 있는 윈투어는 알려진 연봉만 200만 달러(약 21억4000만원). 포브스가 선정한 ‘2013 세계 파워 여성 41위’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에서 주영국 또는 주프랑스 미국대사 후보로도 여러 차례 거론됐을 정도로 패션계 바깥에서도 주목받는 인사다.



애나 윈투어는 언론 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 찰스 윈투어는 영국 일간 이브닝스탠더드 국장을 역임했고 남동생 패트릭은 영국 일간 가디언의 현역 정치부장이다.



프런트 로의 패션 권력자. 왼쪽부터 보그US 그레이스 코딩턴과 애나 윈투어, 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딸 델핀, 모델 나탈리아 보디아노바, INYT 수지 멘키스. 오른쪽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절대 권력자 미란다 편집장(가운데?메릴 스트립)과 앤디 삭스(왼쪽?앤 해서웨이).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중앙포토]


 애나 윈투어의 영향력은 패션쇼 바로 전날, 준비된 의상을 몽땅 바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를 소재로 해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그런 장면이 그려진다. 뉴욕 패션쇼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한 패션디자이너의 쇼 하루 전날, 윈투어의 영화 속 버전인 미란다 프리스틀리 편집장이 작업실에 들이닥친다. 쇼에 나갈 옷을 본 편집장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디자이너는 곧 알아채고 편집장이 떠난 뒤 전체 의상을 새로 만드느라 법석을 떤다. 최소 6개월에 걸친 노고가 절대 권력자의 작은 반응으로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윈투어의 혹평이 곧 패션계에서의 사형선고와 다름없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 준 장면이다.



 프런트 로 지정석의 또 다른 주인공은 수지 멘키스(71)다.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INYT)의 수석 패션기자이자 담당 에디터다. 1988년부터 27년째 INYT 패션기사를 전담하고 있다. 멘키스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현장 곳곳을 누빈다. 그가 참석하는 뉴욕·밀라노·런던·파리 4대 컬렉션의 패션쇼는 어림잡아 600여 개에 이른다. 균형 잡힌 비평과 INYT의 매체력이 그의 힘이다.



2001년엔 그의 영향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무산된 일화도 있다. 발단은 멘키스가 세계 최대 명품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에 속한 브랜드 존 갈리아노 패션쇼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기사였다. 존 갈리아노를 비롯, 디올·지방시·루이비통 등 수십 개 명품 패션브랜드를 거느린 LVMH는 보도 직후 멘키스를 그룹 소유 브랜드 패션쇼장에 출입 정지시켰다. 소동은 일주일 만에 LVMH가 사과하며 일단락됐다. ‘멘키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쇼는 시작되지 않는다’는 세계 패션계 불문율이 확인된 사건이다.



멘키스는 이달 초 “INYT를 떠난다”고 발표했다. 새 둥지는 윈투어의 직장, 보그US의 모회사인 콘데나스트그룹이다. 그는 윈투어가 총괄하는 보그US 외 다른 지역(프랑스·일본 등)의 보그 웹사이트에 패션 뉴스를 전하는 ‘인터내셔널 보그 에디터’로 새 커리어를 시작한다. “디지털시대에 맞는 새 역할을 하게 돼 떨린다”는 게 27년 만의 이직 소감이다.



 윈투어·멘키스 2명의 패션 파워 피플은 공통점이 있다. 독특한 머리 모양을 수십 년째 고수하는 것이다. 윈투어는 양뺨을 살짝 덮고 앞머리가 눈썹 위까지 내려오는 ‘보브 스타일’, 멘키스는 앞머리를 위로 말아 올려 동그란 볏처럼 만든 ‘퐁파두르 스타일’을 고집한다. 권력자가 뿜어낼 수 있는 특유의 냉정하고 권위적인 표정도 비슷한 점이다.



 반면 두 사람이 패션쇼에 임하는 태도는 매우 다르다. 윈투어는 선글라스를 끼고 연예인처럼 화려한 옷매무새를 뽐내며 쇼장에 들어선다. 멘키스는 전형적인 기자 차림새다. “기자 월급으론 명품 옷을 사 입을 수 없어서”라는 게 이유다. 천으로 된 자료 담는 가방과 오래된 핸드백 정도가 멘키스의 소품이다. 패션쇼 관전 자세도 사뭇 다르다. 멘키스는 쇼가 시작되기 전 자료를 훑어보고 꼼꼼히 취재 메모를 한다. 윈투어는 연예인 뺨치는 외양에 걸맞게 시종 여유 있게 다리를 꼬고 앉아 패션쇼를 즐기는 편이다.



 윈투어·멘키스 외에도 프런트 로 단골 손님인 세계 패션 파워 피플은 주로 언론계 종사자다. 뉴욕타임스에서 내는 스타일 전문잡지 T의 편집장 브루스 패스크, 패셔니스타이자 보그 일본판 객원기자인 안나 델로루소, 패션모델 출신으로 보그US 예술 분야 디렉터인 그레이스 코딩턴 등이다.



 보통 패션쇼 무대 ‘런웨이’는 일직선 모양이다. 런웨이 양편으로 프런트 로가 펼쳐진다. 한쪽 프런트 로가 언론계 파워 피플 자리라면 맞은편은 바이어 몫이다. 주로 미국의 유명 백화점인 바니스뉴욕·버그도프굿맨과 유명 편집숍 등의 매입 담당자 차지다.



 한편 맨 앞줄을 둘러싼 정치학은 변형 런웨이도 탄생시켰다. 전통적인 일직선 형태 런웨이 대신 U자나 W자 모양인 런웨이가 그것이다. 일직선 런웨이에 비해 U자는 2배가량, W자는 4배 정도 맨 앞줄이 많아진다. 아예 패션쇼를 2회 하는 브랜드도 있다.



샤넬·에르메스·조르지오아르마니·디올 등은 넘치는 ‘수요’를 감안해 같은 쇼를 두 번씩 치른다.



서울패션위크 앞줄 단골은



21일 한국 최대 패션축제를 표방하는 서울패션위크의 막이 올랐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다. 700·500· 300석 규모 패션쇼장 3개가 무대다.



여기에도 세계 패션무대와 마찬가지로 프런트 로(front row)의 단골손님이 있다. 유력 매체 편집장·기자가 최우선 순위로 자리를 배정받는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적용되는 관례적 기준은 두 가지다. ①해당 디자이너·브랜드를 꾸준히 취재하며 패션쇼에 참석해 왔나 ②해당 매체가 영향력(부수 등 기준)이 있는가 등이다.



패션잡지 보그·엘르·바자 등의 한국판 편집장, 한국 신문업계에선 중앙일보가 프런트 로에 초대된다. 애나 윈투어에 비견되는 한국 언론계 인사는 이명희 보그 한국판 편집장이다. 1996년 창간 때부터 올해까지 19년째 편집장을 맡고 있다.



 스타도 프런트 로에 초대된다. 가수 지드래곤(사진)은 ‘본인 취향과 맞지 않으면 절대 패션쇼에 나타나지 않는’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일부 브랜드·디자이너는 쇼 흥행을 위해 거마비를 들여서라도 연예인을 프런트 로에 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거마비는 스타의 지명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현금이 동원되기도 하고 해당 브랜드·디자이너의 의류 등 협찬품으로 갈음할 때도 있다.



 스타 섭외에 일부러 공을 들이기도 하지만 몇몇 디자이너의 패션쇼는 오랫동안 쌓아온 스타와의 돈독한 관계 덕에 스타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참석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오히려 스타들 사이에 ‘초대받지 못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브랜드다. 디자이너 지춘희(미스지콜렉션)·손정완·스티브J&요니P·고태용(비욘드클로짓) 등의 패션쇼가 그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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