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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병원 조제실의 20대 여성, 추리여왕 되다

1906년, 열여섯 살의 애거서 크리스티.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을 공부했던 그는 “프랑스 남자들은 하나같이 정중하며 예의 발랐지만, 아가씨 입장에서 보자면 한없이 지루했다”고 회상했다. [사진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시현 옮김, 황금가지

808쪽, 2만8000원




이른바 ‘벽돌책’이다. 언뜻 읽는 이의 기를 꺾을 만큼 두툼하다. 103개 언어로 된 작품들이 전 세계에서 40억 부나 팔린 ‘추리소설의 여왕’이라지만, 무에 그리 할 말이 많을까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한데 ‘반전’이 있다. 그의 작품처럼 교묘하지는 않지만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란 고정관념을 깨뜨려서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솔하게 자신의 삶과 작품을 이야기하는데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그가 나를 그때의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하기를. 80킬로그램의 묵직한 살과 ‘인자한 할머니’라고만 묘사될 나를 보고서 충격을 받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빈다.”



 20대에 스쳐간 아미아스란 옛사랑이 안부를 물으며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전해오는 대목에서 지은이가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면서 “나도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환상의 대상이고 싶다”는 구절에선 세계적 작가라도 영락없는 여자란 느낌이 든다.



 “식을 올린 다음에 말하지 않고 미리 알려 주어 좀 놀랐단다.”



 스무 살짜리 딸 로잘린드가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하겠다고 ‘통보’하는 데 대한 반응이다. 육군 소령인 사윗감을 마음에 들어하던 터였음에도 이런 말로 섭섭한 마음을 비치는 걸 보면 보통 부모와 다를 바 없다.



 지은이가 60세 되던 1950년부터 15년에 걸쳐 쓴 이 자서전에는 이 같은 일화가 숱하다. 작가의 인간적 면모가 흥미롭긴 하지만 추리소설 애호가들의 관심은 역시 작품과 연관된 대목이겠다.



 크리스티는 1916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병원 조제실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첫 작품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을 썼다. 조제실에선 비교적 여유가 있었고 약을 다루다 보니 독물에 관한 지식이 쌓여 ‘독살’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물론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었다. 언니 매지의 안내로 여덟 살 때 셜록 홈즈를 접한 그는 20대에 밀실 트릭의 고전인 『노란 방의 비밀』(가스통 르루 지음)에 반해 직접 추리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첫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탐정 에르퀼 푸아로의 탄생 배경은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남다른 탐정을 창조하기 위해 고심하다 마침 독일의 공세를 못 견뎌 인근에 와 있던 벨기에 난민에 착안해 벨기에 출신의 전직 경위로 설정했단다. 작가 자신과 달리 자그마한 덩치의 깔끔한 남자, 언제나 물건을 정리하고, 짝을 맞추고, 둥근 것보다 네모난 것을 좋아하면서 ‘작은 회색 뇌세포’를 가진 영리한 탐정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름에 얽힌 뒷이야기도 나온다. 작은 덩치에 어울리는 특색 있는 이름을 궁리하다가 헤라클레스를 뜻하는 에르퀼스를 붙이기로 했지만 푸아로란 성과 맞지 않아 결국 에르퀼 푸아로가 됐다고 한다.



 사상 최장기 연속공연 기록을 가진 연극 ‘쥐덫’은 실제 아동학대 사실에서 모티프를 취했고, 작품명은 사위가 붙였다든가 하는, 100권이 넘는 크리스티의 작품을 좀 더 즐기기 위한 팁들이 가득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1900년대 영국 상류층의 생활,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는 고단함, 당시의 출판계 관행 등 ‘시대의 증언’과 더불어 두 번의 결혼, 두 번째 남편과 함께한 고고학 발굴 이야기 등 인간적 토로는 크리스티 작품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를 빚어낸다.



 첫 작품이 몇 군데 딱지를 맞은 끝에 2년이 지나서야 출간됐으며 그나마 2000부가 팔릴 때까진 인세도 없는 계약을 맺었다든가, 아끼던 자택을 유지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로 나섰다든가, ‘쥐덫’의 인세수익은 “다 그렇듯 대부분 세금으로 들어갔지만” 손자 매튜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들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평전이 아닌, 작가의 자서전은 드물기도 하지만 경험상 매력 있는 책을 만나기는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추리소설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반가울 법하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김성희는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글쓰기를 강의한다. 지은 책으로 『맛있는 책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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