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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15세 사주당, 문중 남자보다 출중 영조 경연관도 놀라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 캠퍼스 뒤의 단봉산 중턱에 있는 사주당 이씨와 남편 유한규의 합장묘. 사주당은 신사임당에 이어 조선 남성 선비와 견줄 만한 여성 선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조용철 기자
1800년대 초반, 유희(柳僖)의 집. 한 선비가 대청에 앉은 노부인에게 절을 하더니 가르침을 받는다. 그는 진사에 급제하는 이면눌이다. 언젠가는 호조판서가 된 이양연도 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노부인은 사주당 이씨다. 이창현과 강필효는 글의 질정을 청했다. 사주당 이씨가 보여 준 선비의 풍모다.

 영조 15년(1739년) 12월 5일 유시(오후 5~7시) 청주. 전주 이씨 노론 가문인 이창식(李昌植)의 집에 딸이 태어났다. 2남5녀의 막내. 어릴 때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집은 넉넉지 않았다. 7대조가 이조판서에 증직(사후에 관명을 주거나 높임)된 이후 실제 벼슬에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 이천배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막내 동서여서 노론에선 뼈대가 있었다.

 소녀는 길쌈과 바느질을 잘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어치웠다. “사람 노릇 하는 것이 이것에 있다는 것인가”라고 일갈했다. 그러곤 『주자가례』 『소학언해』 『여사서』를 읽기 시작했다. 밤엔 길쌈하는 불을 빌려 봤다. 그렇게 1년. 문리가 통했다. 이번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경』 『서경』으로 나갔다. 오빠가 배우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감쌌다. “그러지 마라. 옛 성현의 어머니 중에 누가 글을 몰랐는가.” 소녀는 매진했고 열다섯 전에 이씨 문중 남자를 앞섰다는 말을 듣는다(신작의 『유목천부인이씨묘지명』). 영조의 경연관이었던 남당 한원진이 소문을 듣고 탄복한 것도 이 시기 일로 보인다.

 19세에 아버지상을 당했다. 지극히 아껴 주던 아버지. 3년상 중 솜옷을 입지 않고 끼니도 자주 걸렀다. 이후 25세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 『내훈』이나 『여범』 같은 종류의 여훈서(女訓書)를 편찬하고 이어 유학 경전 자체를 체계적으로 연찬했을 것이라고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는 ‘사주당 이씨의 삶과 학문’에서 추정했다. 역시 영조의 경연관이었던 송명흠이 사주당에 대해 “친척이 아니라 대면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 것도 이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소녀가 규수로 성숙할 동안 용인 구성(驅城)에 사는 소론(少論) 선비 유한규는 연이은 부인상에 상심하고 있었다. 첫 부인은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증손녀 해주 오씨인데 자식 없이 23세에 죽었다. 둘째 부인 평강 전씨는 두 딸을 낳았지만 남편이 을해옥사에 연루돼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자결하고 말았다. 실제로는 시동생이 연루된 것이었다. 셋째 부인 선산 김씨는 아들 흔(俒)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유한규 45세 때의 일이다. 세 부인을 잃은 그는 결혼 생각을 버렸다. 그런데 “한 처녀가 경사에 통하고 행실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청혼했다. 25세 사주당 이씨였다.

 초야에 남편은 “어머니를 잘 모셔 달라”고 당부한다. 부인은 “옳지 않으신 부모는 없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한다. 부인은 문자 냄새를 피우지 않고 효성스러운 며느리, 현명한 부인으로만 처신했다. 시어머니는 자주 아파 부부는 옷을 풀지 못했다. 그렇게 8년을 모셨다. 그러나 부부 금실은 좋았다. 나이 차이가 컸어도 남편은 부인을 지식인처럼 대했고 부인의 글에 서문도 썼다. 식사하며 경을 논했고 시를 지으며 벗처럼 지냈다.

 사주당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논어』 ‘양화편’의 ‘성상근(性相近)’을 논하는데 이(理)와 도심(道心), 칠정(七情) 같은 복잡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부부는 1남3녀를 뒀다. 장남 희(僖)는 후에 실학 백과전서파의 대가가 된다. 그것은 먼 뒤의 일.

 정조 등극 뒤 소론이 등용되면서 유한규는 경릉령 벼슬을 얻는다. 그런데 부인은 봉록과 관직에 집착하지 않고 험한 현미밥을 먹었다. 유한규는 목천현감을 끝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부인 나이 45세인 1783년 다정했던 남편의 죽음으로 삶이 힘겨워진다. 아들 희는 11세. 세 자식 모두 어렸다. 3년상 뒤 부인은 전 부인의 아들 흔에게 “가난하면서 계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늙지 않았으니 누를 끼치지 않겠다”며 용인으로 떠난다.

 어려운 삶이었다. 호미도 없이 밭을 일구고 촛불도 없이 길쌈을 했다. 거북 등처럼 갈라진 손으로 자리를 짜고 소금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인척들이 봉록을 떼어 주려 해도 사양했다. 자식들이 남의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도 금지했다. 그래도 아들은 공부시켰고 딸들에게도 부엌일을 시키지 않았다. 당시 부인들의 의무였던 화식(貨植, 재물 증식)에도 힘써 힘겹게 돈을 모아 선대의 묘를 관리했다.

 가난했어도 사특함은 없었다. 집에 통이 두 개 있었다. 남에게 (곡물 같은 것을) 줄 때 작은 통을, 받을 때 큰 통을 써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이를 바꿨다. 많이 주고 적게 받게 했다. 부인은 “업보를 갚았다”고 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버릴 수 없는 일. 아들 희는 “글에 있어서 경사(經史, 유교경전이나 역사서)는 있었지만 자집(子集, 주석서나 시문)은 안 했다”고 했다. 부인은 당호도 희현(希賢, 현명함을 추구함)에서 사주(師朱)로 바꿨다. 성리학 지식이 높아진 부인은 당쟁에도 일침을 줬다.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리게 된 계기인 회니(懷泥) 시비가 대상이었다. 부인의 친정은 노론, 시댁은 소론이었지만 ‘둘 다 잘못했다’고 일갈했다.

 사주당은 아들을 가르쳤다. 유희는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조종진의 『남악유진사묘지명』). 아들이 입단속을 잘 못함을 걱정하며 “과거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아들은 따랐다. 자식에게 출세만을 목적으로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당쟁에 휩쓸릴 걱정도 있었겠지만 자식에게 선비의 길을 따르라고 한 것 자체가 선비의 모습이다.

 사주당은 여러 저술을 했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그중 62세에 지은 조선시대 유일한 태교서적인 『태교신기』엔 스토리가 있다.

 젊었을 때 지은 『교자집요』를 20년 뒤 막내딸의 궤짝에서 발견하자 그는 이책에서 ‘태(胎)기르는 방법’만 따로 떼내 생각을 덧붙여 『태교신기』를 완성한다. 이를 아들이 재편집하고 우리말로 해석했는데 이를 위당 정인보가 1936년 후손인 유근영을 통해 보고 해제를 작성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주당은 고질 때문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1821년 9월, 83세로 죽기 전 유언으로 “『태교신기』만 남기고 다 태우라”고 했다. 무덤엔 청주 어머니의 수간 두루마리 편지 한 축과 남편과 성리를 논한 글 한 축, 손수 베낀 『격몽요결』 한 권을 넣었다. 아들은 쓴다. “어머니의 바탕은 장부이셨으되 행실은 부인이었노라(質丈夫 行婦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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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