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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선비의 소중한 기록, 서울 고서적상에 팔릴 뻔

사주당 이씨의 아들 유희가 남긴 문집. 그는 널리 알려진『언문지』와 『물명고』외에 100여 권에 가까운 문집인『문통』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시된 문통의 일부.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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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당 사후 200년 가까이 그의 삶을 담은 『가장』은 파란을 겪었다. 책은 아들 유희의 문집인 『문통(文通)』에 남아 후대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문집이 직계로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사주당의 4대손에 이르러 막내 계통인 근영(近永)이 보관하게 된다. 1897년생으로 경기고보(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족보에 따르면 1919년 독립운동에 참여해 옥살이를 했다. 이어 21년 23세엔 경북 예천에 세워진 영신의숙의 훈육교사가 됐다. 의숙은 42년 문을 닫고 근영은 해방 뒤 대창 학교와 동부국민학교(예천군 풍천리 우망초등학교, 현재 폐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문통』을 아꼈다. 문집을 재정리하고 필사했다. 그 과정에서 위당 정인보에게도 보여 줬다. 그러다 49년 6월 돌연 혈압으로 사망한다. 아들 래현(67)씨는 “문집 발간·정리에 많은 돈을 들여 남은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우망초등학교 앞 추모비에도 “사생활이 극히 궁핍했다”고 쓰여 있다. 『문통』은 홀로 남은 부인 권말연씨에게 남겨졌다.

 자식 셋에 먹고살기 힘들었던 권씨는 예천 남쪽 50리, 친정마을인 매천2리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들어왔다. 보리쌀 한 말을 주기도 얻기도 힘든 빈촌. 살 곳도 없어 곁방살이 처지였고 광주리를 이고 물건을 팔았다. 그러다 마을 서당이었다가 창고로 쓰이던 폐가로 들어갔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100년쯤 된 폐옥 같은 곳에서 그들은 30여 년을 살았다. 부인도 문집은 애지중지했다. 궤에 넣어 방 안 벽에 쌓아 보관했다. 책을 아는 몇몇에게 가끔 빌려 줬을 뿐 손도 못 대게 했다. 래현씨는 “한 80권 정도 있었는데 빌려 준 책들이 다 돌아왔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그게 『문통』인지도 몰랐다.

 그 사이 사주당의 방계인 유기봉(67)씨가 문집을 서울로 갖고 왔다. 유씨는 “유희 할아버지가 유명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고등학교 시험에 출제될 만큼인 줄은 몰랐는데 대고모(권말연)가 이름을 널리 알리자고 해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방에 꽉 찬 책 가운데 반듯한 것들만 가져왔다.

 서울로 올라온 문집은 한때 고서적상에 흘러 들어갈 뻔했다. 그러다 1987년 어머니 권말연씨 사후 서울로 올라온 래현씨가 보관하게 됐다. 시간이 흘러 2003년 진주 유씨 문중의 일을 보는 유조호(79)씨가 『문통』의 존재를 알게 됐다. 유씨는 “가 보니 바닥에 책이 널렸는데 물에 젖고 곰팡이가 피고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지를 넣고 잘 말렸다”고 했다. 1년쯤 뒤 200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문집을 넘겼다.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문통』이 빛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이 완역돼 처음으로 사주당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런데 『문통』이 30년 넘게 보관돼 있었고, 100년도 넘었다는 그 집은 어떻게 돼 있을까. 지금은 외양간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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