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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詩처럼 살다간 프란치스코, 휴머니즘 제1영웅의 전기

체스터턴은 키 1m93㎝에 몸무게가 130㎏인 거구였다.
나쁜 중독이건 좋은 중독이건 중독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세계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매료됐다. 교황의 즉위 명이 프란치스코가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열광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동물보호주의, 환경주의의 상징이기도 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예수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살렸다. 13세기의 종교개혁가였다. 그가 없었다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지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개신교 종교개혁도 없었으리라. (성 프란치스코는 개신교에서도 많은 목사, 평신도가 좋아한다.)

가톨릭 교회사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성인 중에서 위상이 성모 마리아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곧이곧대로 ‘과격하게’ 실천한 부담스럽고 또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교황 전에는 누구도 ‘감히’ 프란치스코를 즉위 명으로 쓰지 않았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영문판 표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하느님의 바보’라 지칭한 성 프란치스코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에 대한 수많은 전기(傳記) 중에서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1874~1936)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923)를 빠트릴 수 없다. (아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아직 없다.) 체스터턴은 “기독교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다”고 말한 인물로,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선 “삶 전체가 시(詩)였던 시인, 휴머니즘의 첫 번째 영웅”이라고 평했다.

교황, 체스터턴 시복 운동 기도문 승인
성 프란치스코→체스터턴→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은 흥미롭다. 한때 데카당스(décadence·퇴폐주의) 문학에 빠졌던 체스터턴은 성 프란치스코로 말미암아 자신의 신앙을 복원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대주교로서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체스터턴 시복 운동을 위한 기도문을 승인한 것이었다. 체스터턴이 복자에 이어 성인이 된다면, 언론인·작가의 수호성인이 될 가능성이 꽤 높다.

체스터턴은 작가였다. 세분하면 언론인·칼럼니스트·소설가·시인·전기작가였다. 가톨릭의 대표적인 평신도 신학자·호교론자였다. 1922년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가 견진 이름으로 선택한 게 바로 프란치스코다. 그는 보수주의적 가톨릭 신자들의 아이콘이다.

대학에서 미술과 영문학을 공부하다 중퇴한 체스터턴은 단행본 80편, 에세이 4000편을 남겼는데 이런 식으로 글을 썼다. 예컨대 전기 『토마스 아퀴나스』(1933)를 쓸 때는 이랬다. 여비서에게 책 전체 분량의 50%를 쉴 새 없이 불러준다. (아퀴나스도 같은 방식으로 책을 집필했다. 뇌우처럼 말을 쏟아내면 비서들이 돌아가며 받아쓰기를 했다.) 그런 다음 여비서에게 서점에 가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책을 사오라고 시킨다. 여비사가 “무슨 책이요?”라고 물으면 “아무 책이건 사오라”고 말한다. 여비서 입장에서는 아무 책이나 사올 수 없어 토마스 아퀴나스 전문 학자에게 뭘 사와야 하는지 문의한다. 학자가 작성해 준 목록으로 책방에서 책을 사온다. 책을 받은 체스터턴은 대충 책을 훑어본다. 절대 정독은 안 했다. 줄 칠 일도 없다. 휙휙···. 서문·목차·본문·색인을 빛의 속도로 지나간 다음 책의 나머지 50%를 비서에게 불러준다. 책이 나온다. 수십 년간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한 학자는 ‘절망’한다. 마치 아퀴나스의 저작을 꼼꼼히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아퀴나스의 마음과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를 썼기 때문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50쪽이 안 되는 분량이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체스터턴이 염두에 둔 독자는 학자나 신앙인이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지니고 있는 일반인’이었다. 이런 내용이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포목상집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본명이 아니라 별명이다. 본명은 조반니(요한)다. 프란치스코는 ‘귀여운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프랑스로 장사하러 갔을 때 따라 갔으리라.

프랑스의 풍물, 특히 트루바두르(Troubadour)로 불리는 음유시인들을 흠모했다.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어로 시를 쓴 최초의 시인이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로 시작되는 ‘평화의 기도’의 파괴력은 어쩌면 그가 시인이었기에 가능했다.

회심 전의 프란치스코는 요즘으로 말하면 ‘오렌지족’, 북한말로 표현하자면 ‘놀새’였다. 친구들에게 크게 한 턱 쏘기를 좋아했다. 장안의 소문난 플레이보이였다. 그녀들 집앞에서 세레나데를 한 곡조 뽑으면 ‘양귀비’건 ‘베아트리체’건 ‘로라’건 다 넘어왔다.

프란치스코 제자 생전에 1만 명 넘어
그의 본향 아시시가 전쟁을 하게 됐다. 놀다 놀다 지쳤는지 아니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였는지 또 아니면 집안에 돈은 많으니 장군으로 출세해 권력까지 쥐겠다는 욕망이 불현듯 싹텄는지 모르겠다. 아시시군은 전쟁에서 졌고 프란치스코는 감옥에 갇혔다. 세상 아무 근심이 없던 그로서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실패였으리라. 아버지가 돈으로 감옥에서 그를 빼 왔다. 자꾸 꿈에 ‘그’가 나타나 “네가 갈 길은 지금 네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다. 네가 할 일은 쓰러져가는 내 교회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담이 그를 짓눌렀다. ‘내 팔자에 돈은 있어도 권력은 없는 것인가’ 하는 식으로 고심하던 어느 날 길을 가다 나환자를 만났다. 어려서부터 예수의 나환자 사랑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프란치스코였지만 무서웠다. 도망갔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로마로부터 도망치던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 로마로 돌아갔듯, 프란치스코 또한 예수를 배신할 수 없었다. 나환자에게 되돌아갔다. 수중의 돈을 다 주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러자 그 나환자가 예수라는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줬다고 전한다.

실제였는지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예수를 만난 프란치스코는 ‘탕아’ 생활을 청산한다. ‘맨발의 성인’이 됐다. 헤어 셔츠(hair shirt·고행을 위해 입는 거친 천으로 만든 셔츠)만 남기고 훌훌 다 벗어버린 것이다. ‘정신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따르는 제자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늘어갔다. 예수 운동이 12 제자로 시작됐듯 제자가 12명이었을 때 1209년 교황을 알현한 후 수도회 설립 인가를 받았다. 생전에 제자가 1만 명을 넘었다.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기간에 무슬림들을 옹호했으며 1219년에는 이집트를 방문해 술탄의 개종을 위해 유익한 대화를 나눴다.

성 프란치스코에겐 반(反)지성적(anti-intellectual) 성향이 있었다. ‘서양의 탁발승’이라 할 수 있는 프란치스코는 ‘학승(學僧)’이 아니라 ‘선승(禪僧)’이었다.

중독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빠른 방법은 또 다른 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한때 ‘놀고 먹기 중독자’였던 프란치스코가 중독에서 빠져나왔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일 중독, 섹스 중독, 담배 중독, 남을 미워하는 ‘증오 중독’에서 빠져나와 영육(靈肉) 간에 보다 더 건강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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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