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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뉴욕서 전경환과 친분, DJ 충신으로 정치 역정

국회 동서화합포럼 소속 영·호남 의원들과 함께 지난 3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박지원 의원이 화합의 징을 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왼쪽 사진). 지난 1월 15일 전남 신안 하의도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동서화합포럼 의원들에게 전시 사진을 가르키며 2000년 방북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박지원 의원. [중앙포토]
세상에서 인연을 맺는 계기는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전혀 뜻밖의 일로 평생 기억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1988년 2월 5공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6공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국내 여론은 곧바로 5공 비리 수사를 요구했고, 첫 번째로 전 전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씨를 지목했다. 전씨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면서 위세를 부린 인물이었다.

3월 중순 전씨가 돌연 외국으로 출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은 급진전됐다. 곧이어 전씨가 미국 뉴욕 뉴저지 일대에 거액의 부동산을 은닉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5공 비리 추적하다 알게 된 이름
당시 뉴욕지사에서 근무하던 나는 전씨 재산 추적에 나섰다. 전씨와 가까웠던 교포들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뉴욕 한인회장과 미주지역 한인회 총연합회장을 지낸 A씨를 거명했다. A씨를 ‘전경환의 오른팔’로 부르는 이도, “전씨가 뉴욕에 오면 그 사람이 다 책임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즉시 A씨를 수소문했으나 이미 한국에 가고 없었다. 그는 70년대 초 이민 와서 사업가로 성공했고, 뉴욕 한인회장으로 있던 81년 전 대통령의 방미환영위원장을 맡았다.

전 대통령이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레이건 미국 대통령 취임에 맞춰 방미했을 때 뉴욕 호남향우회를 비롯해 교포들은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A씨가 나서 이를 무마시켰고, 이후 뉴욕 평통자문위 회장도 맡고 정계 진출도 모색했다는 것이다.

그를 만나지 못한 나로서는 다른 교포들을 수소문해야 했다. 뉴욕·롱아일랜드·뉴저지·필라델피아·보스턴까지 차를 몰고 가 전씨 지인들을 만났지만 한결같이 전씨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모르쇠’로 나왔다.

급기야 뉴저지의 주도(州都) 트렌턴의 주지사 사무실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실각한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 일가의 부정부패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일종의 한국판 마르코스 일가 스캔들이다. 한국 독재자의 동생이 이곳에 부동산을 많이 숨겨 놓았다고 한다. 미국은 컴퓨터가 발달돼 개인 재산 자료도 다 전산화돼 있다고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없겠나?”

난감한 표정의 주지사 보좌관은 나를 기자실로 안내했다. 턱수염이 북실북실한 뉴욕타임스 기자가 바쁜 틈에도 성의 있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나라여서 개인의 신상정보를 일절 공개할 수 없다. 대신 방법을 하나 알려 주겠다. 뉴저지에는 21개 카운티(우리의 군과 유사)가 있는데 카운티마다 등기소가 있다. 거기 가면 부동산 소유권 대장(deed)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뒤져 보라.”

한국식으로 말하면 등기부 등본을 열람하라는 소리다. 그 길로 한인 부동산업소를 찾아갔다.

“한국인들이 부동산을 사고 싶어하는 카운티를 순서대로 말해주세요.”

5공 비리를 취재한다는 내 말에 교포들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회사 일이 끝나면 카운티 등기소를 찾아다니며 일일이 열람했다. 10여 일쯤 지났을까. 여섯 번째로 찾아간 에섹스 카운티에서 전씨 부인과 장남 명의의 집을 발견했다. 대지 300평, 건평 45평의 중산층 주택으로 유학 온 전씨 아들과 딸이 살고 있었다.

한국 신문들이 연일 전씨 해외재산 은닉설을 대서특필해 왔지만 물증이 확인된 것은 이것이 유일무이했다. 기사가 나간 뒤 대검 중앙수사부 간부가 전화를 했다. “함 기자가 검찰 체면을 살려 주었소. 전씨를 외화 도피 혐의로 추가 기소할 겁니다.”

집권 뒤 옛일 캐묻자 “그땐 의전상…”
몇 년 뒤인 92년 대선 때 김영삼(YS)과 김대중(DJ) 간 격돌이 벌어졌다. 이때 DJ의 대변인으로 ‘박지원’이란 사람이 등장했다. 뉴욕 한인회장 출신인 그는 87년 귀국 후 평민당에 입당했고 92년 14대 전국구 의원이 돼 DJ의 ‘입’으로 급부상했다.

박지원?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었다. 혹시나 해서 전경환 재산 취재 노트를 뒤져 보니 뉴욕에서 만나지 못했던 A씨가 바로 그였다. 순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DJ를 만나 ‘돈독한’ 관계를 맺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후 다시 세월이 흘렀다. 박씨는 승승장구해 동교동계 가신들을 제치고 DJ의 ‘No.1 맨’으로 자리를 굳혔다. 98년 DJ정권이 출범하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장관을 역임했고 2001년 다시 청와대로 들어와 정책기획수석·비서실장을 지내며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했다.

나와의 첫 대면은 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홍콩을 방문했을 때였다. 홍콩특파원이던 나는 특파원 중 유일하게 공식 만찬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홍콩 정부를 자주 출입하면서 이것저것을 요구하다 보니 행정수반 비서실에서 붙여준 별명이 ‘Mr. Persistent(끈질긴 친구)’. 그네들이 나름 배려해 준 것이었다. 막간을 이용해 박씨에게 다가가 “전경환을 압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얼버무리며 얼른 내 곁을 떠났다.

두 번째 만남은 2001년 6월 이뤄졌다. 당시는 언론으로서 비상시국이었다. DJ 정권은 세무조사를 통해 그동안 벼르던 ‘언론 권력’을 손보자는 입장이었고, 보수언론은 ‘언론 탄압’으로 여기고 일전불사를 다짐했다. 해외에 있던 나 역시 갑자기 불려 들어와 사회부장을 맡게 됐다.

국세청은 6월 20일 전국 23개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6개 언론사를 고발했다. 곧 검찰 수사와 사주 구속 등이 뒤따를 예정이었다.

바로 이날 청와대 정책수석을 맡고 있던 박씨가 시내 한정식 집으로 중앙 일간지 사회부장단을 초대했다. ‘언론과의 전쟁’을 앞두고 ‘권력의 칼자루’을 쥔 박지원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홍콩에서 단 한 번 나를 만났을 뿐인데도 마치 늘 보던 사람처럼 농담을 걸었다.

“대(大) 신문사 사회부장이 됐으면 오늘 이 자리에 구두 표 하나씩이라도 돌려야 되는 것 아니오?”

술판이 벌어졌다. 폭탄주가 돌고 농담이 오고 갔다. 박씨의 다소 호기 어린 모습에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 나는 13년 전 뉴욕 이야기를 꺼냈다. “박 수석, 뉴욕서 전경환과 그렇게 친했다면서요?”

그 말에 박지원은 그날 처음으로 굳어진 표정을 보여 주었다.

“아…, 뉴욕 한인회장을 하다 보면 의전상 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매우 가까웠다고 하던데…. 전경환의 ‘가방모찌’(어떤 사람의 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노릇을 했다면서요?”

그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좀 거칠게 말을 했다. 어차피 권력과 언론 간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번진 판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날 이후 그는 내게 잘 대했다. 내가 전화를 걸면 즉각 받았고 어떤 사건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면 적당히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DJ 정권 말기에 우리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시 만났다. 대통령의 아들 2명이 구속되는 등 진통을 겪은 후였다. 그는 만나자마자 대뜸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궁금증에 바로 “그게 누군데요”라고 물었다.

“조철봉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일제히 우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조철봉은 당시 문화일보에 연재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성인 소설의 주인공으로 일종의 한국판 카사노바였다. 박지원은 대통령 비서실장의 위치에서도 그렇게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알았다.

누구와도 손잡고 굽힐 줄 아는 인물
그는 여러 얼굴의 사나이다. 스스로 고백했듯 ‘좌익의 아들’이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였고, ‘전경환의 오른팔’을 거쳐 ‘DJ의 충신’이 됐다. 그런 전력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과 칭찬 역시 극명하게 갈린다.

그는 세상에 굴신(屈身)할 줄 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굽히고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인물 같다. 언론사를 찾아가 간부들에게 거친 행동으로 권력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아들 뻘 되는 기자에게 공손히 술을 따르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기에 늘 그의 진심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정치인으로서 철학과 비전은….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은 권력 그 자체가 아닐까?

그를 보면 이방원과 정몽주의 고사(古事)가 떠오른다. 박지원의 이력을 돌아보면 그는 정몽주보다 이방원 편에 설 인물이다. 정치적 스승인 DJ가 정치인의 덕목으로 강조한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 중 그는 철저히 후자 쪽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정치인 박지원의 존재 이유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박지원은 DJ의 충신이 되기까지 평생 주변인(outsider)으로 맴돌았고 끊임없이 권력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후 자신의 연고인 호남 세력에 편입된 뒤에도 DJ 적손인 민주화 동지들로부터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떠난 후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DJ 사후 최고위원, 당 원내대표를 거치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이 나라 정치인의 삶을 몸으로 통렬히 체험한 그이기에 도리어 속 좁고 척박한 한국적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념(理念)으로 포장된 이권(利權), 개혁(改革)으로 위장한 개악(改惡), 명분(名分)으로 치장한 명리(名利)와 더불어 혈연·학연·지연 등 온갖 연고(緣故)가 판치는 이 위선적 정치판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좌우를 넘나들며 ‘솔직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이제 70대 노정객이 된 지금, 그가 이해타산으로 뒤얽힌 정치판에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마음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올 들어 영·호남 출신의원 20여 명이 전남 하의도 DJ 생가와 경북 구미 박정희 생가를 차례로 방문하고 사진을 찍었을 때 박지원은 그 한가운데서 환하게 웃었다. 지역갈등 해소와 여야 화합을 다짐하는 모임을 주도한 그의 역할이야말로 그다운 행동이요,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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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