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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그가 아니었다면 난? 우리 문화계는?

이강숙(1936~)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2011년 장편소설 『젊은 음악가의 초상』을 펴내 문인의 꿈을 이뤘다. [중앙포토]
어렸을 적 역사책을 붙들고 다닐 때는 잘 몰랐었는데 살면서 점점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때때로 세상은 단 한 사람 때문에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곳이라는 것

내가 만난 천재 ④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총장

‘예수나 히틀러가 없었다면’이 너무 극단적인 가정이라면 스티브 잡스나 샤넬로 가정해 보아도 꽤나 설득력 있지 않은가. 같은 맥락에서 이분이 안 계셨더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계는,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본다. 젊은 날은 예술학교를 창설하는 데 고군분투,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길러내는 데 모두 바치시고 얼마 전에는 평생의 꿈이었던 문학가로 데뷔하신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총장님 얘기다.

총장님과의 첫 만남은 1999년 어느 날의 일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예비학교에 입학한 지 반년 만에 미국에서 열린 청소년 콩쿠르에서 상을 타고 온 나에게 당시 지도교수였던 김대진 교수님은 좋은 타이밍에 총장님께 첫 인사를 드리고 오기를 권하셨다. 그런데 지하철 공사 때문에 약속시간에 한참 늦어서야 총장님 방에 당도했다. 헉헉거리는 우리에게 초면의 총장님은 이렇게 늦으면 어떡하냐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 아무리 여러 번 사과드려도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화를 못 삭이시는 모습을 보며 인사는커녕 실례만 하고 가나보다 자책하며 겨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총장님께서 “그래, 김대진 선생이 그렇게 자랑을 하던데 어디 나한테도 한 번 쳐줄 수 있겠니” 하시며 뚜껑 위에 책이 마구 놓인 집무실의 업라이트 피아노를 가리키셨다.

당시의 나는 정식 무대가 아니면 단 한 사람만 옆에 있어도 손이 굳어버리는 숫기 제로의 소녀. 그래도 총장님의 요청이니 어쩔 수 없이 며칠 전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업라이트 피아노가 부서져라 쳤다. 약 10분에 걸친 곡이 끝나고 총장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코다가 너무 빠른 것 같지 않니?” 아까 화가 났던 건 완전히 잊어버리신 건지 ‘그 템포가 왜 빨랐던 것인가’에 대한 총장님의 설명을 한참 듣고 방을 나오니 한 시간 반이 흘러 있었다. 그날 뵌 총장님의 모습은 대학교의 총장보다는 뭐랄까, 위인전에 나오는 예술가 같았다. 베토벤 같은.

대학교 1학년이던 2002년 10월, 이탈리아 베르첼리에서 열린 비오티 콩쿠르에서 상을 타고 돌아왔을 때 총장님이 나를 다시 찾으셨다. 음악원 개원 이래 피아노과 재학생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것이 처음이라서인지 손녀의 일처럼 좋아하시며 칭찬해주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총장님은 내 얘기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셨다. 소설? 고작 나 같은 애를 주인공으로 소설이라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총장님을 말리고 싶었으나 결국 그날부터 총장님과 나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처음 피아노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그때 느낌은 어땠는지, 지금껏 배운 선생님은 어땠는지, 뭘 어떻게 배웠는지, 콩쿠르는 어떻게 다녔는지. 쏟아지는 질문 속에 안경 너머 총장님의 번득이는 눈을 보면서도 스스로의 짧은 인생 역정이 흥미로울 리 없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버린 나는 물으시는 말보다도 더 짧게 대답하기 일쑤였다. “그냥… 했어요.” “그냥… 그렇게 되었고요.” 속이 터지는 기분을 맛보셨을 총장님은 결국 나 대신 우리 엄마에게 SOS를 쳤다. 한가한 날을 골라 서울로 온 엄마 덕에 다행히 원하는 결과물을 조금 얻어내신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집안이 어려웠을 때도 있다고는 하지만 음악 하나는 매우 순탄하게 했네요. 복이 많아.” 주위의 유복한 음악도 친구들과 항상 스스로를 비교해 온 어린 나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 순간 나는 내 삶을 꿰뚫어버리신 총장님 앞에서 스스로의 낯가림을 끝내버렸을 뿐이었다.

2003년부터 석좌교수로 직함이 바뀐 총장님의 ‘주제별 특강’ 강의는 1학점짜리 수업이었는데도 강의신청이 시작되자마자 만원이었다. 같은 시간에 들어야 했던 다른 전공필수 수업 때문에 애초에 신청을 포기한 나는 강의가 너무 좋아 한숨밖에 안 나온다는 작곡과 동기 오빠의 자랑을 여러 번 듣고는 무언가에 홀려 총장님 방을 찾았다. “요즘에는 뭘 연습하니?”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요” “아! 그 곡을 한국에서 처음 연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니?” “총장님….” “그래, 아는구나…! 참 좋은 곡이지.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 곡이 참 좋아.” “쇼팽을 좋아하세요?” “그럼. 하지만 슈베르트나… 베토벤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턱 막힌단 말이야.” 상대를 단숨에 자기 세계로 초대하시는 총장님의 마법에 대화는 1분도 안 되어 베토벤으로, 철학으로, 문학으로, 미학으로 넘어간다. 미학에 대해 설명하시는 총장님의 눈은 어린아이 같기도, 또는 해탈한 동양철학자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참 모르겠는 것이 많단 말이야.” 그날 이후 몇 번이나 더 총장님 방에 들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들어갔다 나와 시계를 보면 늘 세 시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나를 포함한 4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음악도들이 수상했을 때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꼈다” 고 말씀하신 총장님의 인터뷰를 얼마 전에야 봤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지를. 우리 모두를 자신의 인생으로 껴안으신 그분이 안 계셨더라면 ‘대한민국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 이제는 문인으로 제2의 인생을 여신 총장님께 모자란 이 글을 바친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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