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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고구려·백제 고유 성씨, 망국과 함께 점차 사라져

통일신라의 성(姓)은 이후 한국인 성의 주류가 됐다. 소위 이·정·손·최·배·설의 6부성과 왕을 배출한 박·석·김이다. 『삼국사기』 엔 석씨와 관련, “탈해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62살이었는데 성은 석(昔)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라고 나온다. 사진은 석탈해 왕릉. [사진 권태균]
삼한통합은 여러 갈래로 전개될 수 있던 한국사의 방향을 하나의 길로 이끈 한국사상 가장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다. 삼한통합을 통해 백제·고구려 오리진이 아닌 신라 오리진의 한국·한국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려묘지명집성』(제3판, 김용선 편저, 2001)에는 고려인 317명의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백제인·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이름은 없다. 대신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는 이름은 다수다. 박씨나 김씨의 시조 탄생신화나 이씨의 시조 알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사망한 박전지(朴全之) 묘지명에는 “가계는 죽주(竹州)에서 나왔고, 그 선조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로 자줏빛 알에서 태어났다. 그 알이 박(瓠)과 같았으며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향인들이 박(瓠)을 박(朴)이라 하였기에 성을 박이라 하고, 그 능을 봉하여 천흥(天興)이라 했다. 군(君, 박전지)은 자(혁거세)의 계통을 이은 삼한벽상공신 박기오의 13세손이다”고 나온다.

김봉모(金鳳毛) 묘지명에는 ‘김씨 가계는 신라 왕실에서 나왔다’고 하며 탈해왕이 김씨의 시조가 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한다.

김유신의 김씨도 왕을 배출한 신라 3성의 하나이며 현대 한국의 가장 큰 성(姓)의 하나다.
“시조는 금궤에서 나왔기에 김(金)을 성으로 삼았다. 김씨 자손이 이어져 왕에 오른 이가 50여 명이 되었다. 우리 태조가 통일하려고 하니, 왕은 형세가 힘껏 싸우지 못할 것임을 알고 나라를 들어 귀부했다. 태조가 상보(尙父) 정승공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보다 위에 두었으며 장녀 산란 공주를 처로 삼게 했다.”

희종 5년(1209)에 세상을 떠난 김봉모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나온다.

1376년 사망한 이제현의 묘지명에는 “공의 이름은 제현(濟賢)이고 자(字)는 중사(仲思)이며 아버지의 성은 이씨(李氏)다. 신라 시조 혁거세 때의 좌명대신(佐命大臣)으로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있었다”고 나온다. 고려 묘지의 많은 인물의 시조는 신라인으로 적혀 있다.

『한국의 성씨와 족보』(이수건, 2003)를 통해 대신라 이후 한국 지배세력의 실상을 볼 수 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멸망시키며 많은 공신을 책봉했다. 이들 삼한 공신은 고려의 각 주·부·군·현마다 토성(土姓)을 가진 몇 개의 세력을 인정해 주고, 해당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했다.

고려 지배 세력도 신라인이 시조
신라 말 왕경인도 고려 초 여러 곳으로 이주하면서 토성을 받았다. 전주로 이주한 종성 중 김씨는 전주 김씨가 되고, 육부성 중 이씨는 전주 이씨가 됐다. 원래 신라인들을 포함해 토성을 가진 세력들은 고려 지배세력인 향리층이 되었다. 고려의 향리층은 조선의 양반층으로 이어졌다.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의 많은 본관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김씨·이씨·최씨·박씨·정씨 등의 성을 가졌다. 백제나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이나 본관을 찾기는 어렵다.

6회에서 신라는 피정복민 차별정책을 펴서 지방에 살던 옛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진촌주층(신라 왕경의 5두품에 해당하는 대우, 현재의 면장 정도 지위)까지만 대우했다고 했다. 지방에는 그 이상 줄 자리도 없었다. 거기에 전국 주·군·현·소경의 하부 지방조직인 행정촌(현재의 면 정도)에는 왕경인을 내시령(內視令)으로 임명해 촌주를 통제했다.

이렇게 하여 원래 신라의 지방민뿐 아니라 옛 백제와 고구려 지방의 피정복민들까지 왕경인들과의 사회·정치적 간격을 ‘좁힐 수 없을 만큼’ 벌려 놓은 것이다. 그것이 신라 골품제 사회였다.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는 왕국 전체의 주요 관직과 상층 신분은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서라벌 소국(또는 사로국 등으로 불렸음) 사람들의 차지였다. 진한 소국들을 정복한 서라벌 소국은 신라 왕국의 서울인 왕경이 되었고, 서라벌 소국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여 왕경인(서울사람)들이 탄생했다. 532년에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 구해(또는 구형)와 그 일족과 같이 신라에 항복했거나 정복당한 피정복민들 중 일부가 왕경으로 옮겨져 왕경인이 되기도 했다.

원래 왕경인은 육부성(六部姓)과 종성(宗姓)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 나오는 육부성부터 보자. “진한(서라벌)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인데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 방면이다. (촌)장은 알평이며 그가 처음 표암봉에 내려왔으며 급량부 이(李)씨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고허촌인데 장은 소벌도리이며 그가 처음 형산에 내려왔다. 이가 사량부 정(鄭)씨의 조상이 되었다. 셋째는 무산대수촌인데 장은 구례마이며 처음 이산에 내려왔다.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孫)씨의 조상이 되었다. 넷째는 자산진지촌인데 장은 지백호이며 처음 화산에 내려왔고 본피부 최(崔)씨의 조상이 되었다.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인데 장은 지타이며 처음 명활산에 내려왔고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 되었다.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장은 호진이며 처음 금강산에 내려왔고 습비부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삼국유사』 1, 기이 2, 신라시조 혁거세왕)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에 최씨, 본피부에 정씨로 바뀌어 있지만 신라 건국신화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다수가 사용하고 있는 육부성(이씨·정씨·손씨·최씨·배씨·설씨)의 시조를 알 수 있다. 혁거세가 등장하기 이전 6촌장들이 각 촌의 최고 지배세력으로 있을 때 한자(漢字) 성을 사용했을 리 없다. 6촌의 촌락민들은 알평 등 시조를 기억하고, 촌장들을 기억하며 그 씨족을 유지해 나갔다. 후에 한자식 성을 사용할 때 비로소 이씨 등의 성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박씨·석씨·김씨의 종성(宗姓) 또는 천강성(天降姓, 왕을 배출한 성)의 기원이다. 『삼국사기』엔 “(신라)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기원전 57년)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이다. 그때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 탈해왕 즉위조에는 “탈해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62살이었는데 성은 석(昔)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라고 나온다. 또 탈해왕 9년 조에는 금성 서쪽 시림의 작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나온 알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가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씨라 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 통일로 한국사 무대 좁아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라 초기의 왕을 배출한 박씨·석씨·김씨의 종성(宗姓)과 건국신화나 유리왕 9년에 주었다는 이씨·정씨·손씨·최씨·배씨·설씨의 육부성(『삼국사기』의 순서)이 한국인의 다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신라인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까지 포함하면 한국인의 태반이 신라인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이 통계를 그대로 믿자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역사의 대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신라로 합류한 백제·고구려인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피정복민이 됐다 해도 피는 계속 흐를 것 아닌가. 진촌주층으로 편입된 피정복민은 혈족을 유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원래 신라인들과 혼인해 혈연적 유대를 맺고 시간이 지나며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 신라인이 되어 갔다.

평인(백성)이 된 사람들은 도태의 흐름에 쓸려 갔다. 당시 평인의 삶은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48, ‘효녀지은 조’엔 궁핍한 사정이 나온다.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 지은은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나이 서른둘에 시집을 가지 못했다. 품을 팔고 밥을 얻어 어머니를 먹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쌀 10여 섬에 몸을 팔아 부잣집의 종이 됐다. 낮에는 종일 주인집에서 일하고 밤에 돌아와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그런 사정을 알고 두 사람이 통곡을 했다.” 신라인이 그럴 정도다.

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된 『촌락문서』도 참고할 만하다. 신라 촌락에는 노비가 된 평민들이 있다. 촌주의 일족들이 평인으로 신분이 떨어지기도 하고, 평인들은 결혼을 못해 가족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노비로 몸을 파는 일도 벌어졌다. 그런 이들 가운데 백제·고구려 사람들의 피가 흐르긴 할 것이다. 그러나 대신라시대에 신라인으로 정체성이 바뀌면서 피가 흐려지거나 사라져 간 것이 피정복민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고조선·백제·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들은 대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현재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면 한국인은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현재 한국인은 없을 것이고, 한국사를 이어 온 왕국들도 신라·고려·조선이 아니라 고구려를 이어 또 다른 나라들이 이어졌을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결과 한국사의 무대가 좁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혈족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인가?

현재도 경주에 있는 신라의 종성(박씨의 숭덕전, 김씨의 숭혜전, 석씨의 숭신전)과 육부성 등 시조나 조상을 모신 사당이나 태종무열대왕왕릉 등에서 전국에서 온 후손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들은 한국·한국인·한국사회·한국문화의 오리진이 신라라는 역사적 코드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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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