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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대하면 원한 풀린다” 대륙 화답에 가슴 뛴 장징궈

신중국선포 32주년을 앞두고 3통과 통일 이후 대만정책(葉九條)을 발표하는 전인대 위원장 예젠잉. 葉九條는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원시적인 구상이나 다름없었다. 1981년 9월 30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1981년 9월 30일, 전인대 상무위원장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은 평화통일에 관한 대륙의 방침을 내외에 천명했다. 모두 9개 조항이라 “葉九條”라고 불렀다. 타이완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告臺灣同胞書) 발표 후 33개월간 해외와 국내의 반응을 떠본 결과였다.

<1>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양당은 대등한 입장에서 담판에 임한다. <2>쌍방은 서신왕래, 통상, 항로 개설, 친지방문, 자유여행과 학술, 문화, 체육교류를 실현시키기 위해 협의한다. <3>통일 후 타이완은 군대를 보유한다. 특별행정구역으로 설정해 특별자치권을 누린다. <4>타이완의 사회, 경제제도와 생활방식, 외국과의 경제문화관계는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개인재산과 주택, 토지의 소유권과 계승권, 그간 외국에 투자한 자본들도 침범을 받지 않는다. <5>타이완 정계의 영수는 전국적 정치기구의 지도자로 국가경영에 참여한다. <6>타이완의 재정상태가 어려움에 봉착하면 대륙 중앙정부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7>고향에 돌아와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타이완 동포에게 대륙은 직장을 안배하고, 자유왕래를 보장한다. <8>타이완 공·상계의 대륙 투자를 환영한다. 권익과 이윤을 보장한다. <9>타이완 각계인사와 단체의 통일에 관한 건의를 환영한다.

해외 여론은 “葉九條”에 긍정적이었다. “누가 봐도 타이완의 이익을 전제로 한 평화통일안”이라며 대륙 측의 성의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7개월 후인 82년 4월, 장징궈(蔣經國)가 부친 장제스(蔣介石)를 추모하는 글을 발표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넘쳐났다. “부친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영혼이 고향에 있는 조상들과 함께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모든 이들의 효심이 민족의 정을 확산시키고, 민족을 경애하며, 국가에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륙 방문 가능성에 들떠 장제스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온 퇴역군인. 1982년 가을, 타이베이.
장징궈의 글을 접한 중공의 타이완 공작소조 조장 덩잉차오(鄧潁楚·등영초)는 전인대 부위원장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를 불렀다. “장징궈는 속이 깊은 사람이다. 남편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생전에 칭찬을 많이 했다. 자세히 봐라. 이건 보통 내용이 아니다. 회답으로 간주해도 된다”며 장징궈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자고 건의했다. “장징궈에게 사사로운 형식의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중국 천지에 너밖에 없다.”

장징궈와 랴오청즈, 두 집안은 뿌리가 깊은 사이였다. 국민당 원훈이었던 랴오청즈의 아버지가 황푸(黃埔)군관학교 당 대표시절, 장징궈는 교장 아들이었다. 한 울타리 안에 살며 어찌나 친했던지 친형제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스크바에서도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나이는 랴오청즈가 두 살 위였다.

5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던 랴오청즈는 중국 고전에도 능했다. “내 동생 징궈(經國吾弟)”로 시작되는 천하의 명문 “장징궈 선생께 보내는 편지(致蔣經國先生信)”를 인민일보를 통해 만천하에 공개했다.

랴오청즈는 장징궈에게 제3차 국공합작의 실현을 간곡히 호소했다. “타이완은 언젠가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골육이 분리된 동포들의 애통함을 동생이 아니면 누가 풀어 주겠는가. 통일은 빠를수록 좋다. 이 위업을 동생이 실현해야 한다. 아태지구와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길이다. 우리는 만나서 한 번 씩하고 웃으면 모든 원한이 풀리는 사이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자. 내 동생이 세인의 추앙을 받고, 이름이 청사에 빛나기를 나는 소망한다.”

훗날, 랴오청즈의 편지를 읽은 장징궈의 반응을 측근들이 구술로 남겼다.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돋보기를 낀 총통은 신문에 실린 랴오청즈의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읽고 또 읽었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그간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토해내는 것 같았다. 모두가 역사의 죄인, 얼굴 마주하고 한 번 웃으면 모든 원한이 풀리는 사이라는 말에 심장이 뛰는 듯했다. 총통은 온갖 신산을 다 겪은 사람이다. 몇십 년 만에, 다른 사람도 아닌 랴오청즈의 글을 대하는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만 할 뿐이다.”

장징궈는 미동도 안 했다. 대신 미국에 머무르던 계모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 랴오청즈에게 보낸 답신을 공개했다. 랴오청즈의 편지에 쑹메이링의 안부를 묻는 대목이 있다 보니 명분이 있었다.

쑹메이링은 문혁시절 화를 당한 “내 조카 랴오청즈”의 안부를 물으며 공산당에 맹폭을 가했다. “중화민국은 국민정부 집권 이래 국부(孫文)의 사상과 애국정신을 저버린 적이 없다. 정의감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은 같은 종족인 마르크스를 내동댕이쳤다. 공산당은 같은 민족에게 폐족(廢族)당한 사람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며,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중화민족을 훈련시킨다. 대륙을 대표한다는 문호 궈뭐뤄(郭沫若·곽말약) 시에서 스탈린이 나의 아버지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치욕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3일간 구토를 해도 그치지가 않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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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