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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란엔 서걱이는 대밭, 뜰엔 햇볕과 적막, 무엇을 더 바라랴

남은 일
- 서정태

걸친 것 다 벗어버리고
다 그만두고
초가삼간 고향집에 돌아오니
알몸이어서 좋다
 
아직은 춘분이 멀어서
바람끝 차가웁지만
방안이 아늑해서 좋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바깥세상에 한바탕
꽃피는 걸 바라다볼 일일뿐

미당 서정주 시인의 동생인 우하 서정태 선생은 생가 바로 옆의 터를 사 삼간(3칸) 하나에 아래채 하나를 지었다. 선생이 아래채 문턱에 앉아 웃고 있다. 안성식 기자

미당 생가 아래, 8살 아래 아우의 황토집

프랑스 루르드 샘물에 이어 세계에서 둘뿐이라는 게르마늄 온천이 솟고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으며 전국 바지락의 70%가 생산되는 곳은? 대량의 고인돌 유적지가 발견되고 나라 안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가 있으며 토질이 좋아 전국 소나무 묘목의 30%를 생산하는 지역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은 분을 위해 세 번째 힌트를 드리겠다. 복분자의 당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으며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풍천에서 유독 살찐 뱀장어가 잡히는 고장은? (풍천장어는 먹장어, 붕장어, 갯장어가 아닌 뱀장어다.)

짐작대로 답은 고창이다. 그러나 고창을 고창이게 만드는 진정한 명물은 복분자와 풍천장어가 아니고 소나무와 바지락도 아니다. 바로 선운사와 동백과 미당이다. 선운사와 동백과 미당은 서로 깊이 얽혀 있어 누가 먼저인지를 따지는 건 부질없다. 그렇다. 지령은 인걸이다. 한 고장의 내력을 완성하는 것은 산맥과 물길과 특산물이 아니라 그 땅의 지수화풍으로 빚어진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선운사 동구는 미당의 시가 있어 비로소 선운사 동구가 된다.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가 없는 선운사 동백은 싱겁고 지루하고 평범할 뿐이다.

1 우하 선생의 집은 왼쪽으로는 생가를, 앞쪽으로는 선산을, 뒤뜰에는 대밭을 두고 있다.
2 집은 좁지만 마당은 너르다. 찾아오는 이가 많을 땐 우하 선생은 툇마루에, 손님들은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3 선운사 도솔암을 찾아 진용 스님과 차를 마시며 환담을 하고 있다. 아흔이 넘은 우하 선생은 지팡이를 짚고 도솔암의 돌계단을 혼자 힘으로 올랐다.

작년 올해 고창 걸음이 잦았다. 한 번 가고 두 번 가면서 차츰 고장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엔 마당의 손아래 동생이 산다. 미당 생가 바로 곁에 초가삼간을 지었다. 우하 서정태. 올해 나이 아흔둘(이하 한국나이 기준). 1915년 생 미당이 살았으면 100세니 8살 아래 아우다. 형이 워낙 거물이라 그 빛에 가렸지만 우하도 진작부터 시인이었다. 재작년 아흔 나이에 그동안 쓴 시 아흔 편을 추려 두 번째 시집을 펴냈다. 피붙이도 아내도 다 떼어버리고 지금 혼자다. “자유를 얻고 싶었어. 하느님, 부처님 같은 절대신으로부터도 해방되고 싶었어. 혼자 살지 않으면 그런 거 못 얻잖어?”

아흔이 넘었으나 머리올이 성근 것도 아니고 검버섯이 핀 것도 아니고 눈과 귀가 어두운 것도 아니다. 해맑은 피부에 천진한 미소를 띠고 짜랑짜랑한 음성으로 혼자 사는 기쁨을 말한다.

“내 전 생애를 통틀어 요즘이 가장 좋아. 요사이 말로 하면 그 뭐라드라 행복해. 내 시 중에 ‘자족’이란 게 있어. 들어볼래? ‘보리 섞인 밥 한 공기와/무국과/ 김치 한 접시/김 두 장/아침상 차려먹고 나니 /천하는 내 것이다//고샅길에 나가면/ 어린아이들/저희들끼리 놀다가도 할아버지 달려오고/젊은 아낙도 머리 숙여 인사한다// 하늘이여/고운 하늘이여/ 티없는 하루가 되게 하라’ ” 정말 더 바랄 게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미당의 아우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어쩌면 멍에였다. 시에서도 삶에서도 두루 그랬지만 이젠 ‘미당 그 양반’으로부터도 해방을 얻었다. 집은 글자 그대로 삼간(3칸)이다.

조선 민초들의 초가삼간은 방 하나 마루 하나 부엌 하나로 초간결하게 구성됐었지만 지금 우하의 우하정은 엄밀히 말하면 원룸이다. 방 윗목에 간편한 싱크대를 둬서 부엌을 방에 들이고 대신 욕실을 머리맡으로 당겼다. “동생이란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났다는 뜻 아냐. 미당의 생가가 당연히 내 생가도 되지. 저기 들어가 살아도 안 될 거야 없지. 그래도 구경 오는 사람이 하루 스물 나마 돼. 번거로와서 곁에다 조그맣게 따로 하나 지었어.” 우하의 말은 담백하고 맑다. 문장이 짧고 핵심단어가 적확해 논리와 통찰이 번득인다. 게다가 은은한 무늬처럼 위트가 담겨 있다. 노인이 되면 기억력이 감퇴하고 문장이 느슨해진다는 건 생각 짧은 젊은이들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무릎까지 오는 낮은 돌담 안으로 해당화를 심어 울타리로 삼았다. 지금은 마른 열매만 남았지만 봄이면 해당화 향기가 마당을 가득 채운다.
아흔 넘어까지 시 써 … 시의 신 접신 공간

우하가 뭔 뜻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또 아래라는 거지. 내가 미당 저 냥반의 동생이고 집도 바로 아래 있잖아. 그래서 또 아래야. 허허. 겉으로는 겸손한 듯하지?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게 아주 건방진 이름이야. 우리 조상에 서거정이란 양반이 있거든. 그 양반 호가 사가정(四佳亭)이야. 정정정(亭亭亭)이라고도 해. 내 위로 그런 정(亭)들이 자꾸 있다는 거거든. 나도 그 계열의 하나라는 거니 여간 건방진 게 아니지.”

작은 초가를 흙으로 짓고 싶었다. 생가도 초가였으니 기와를 얹기는 싫었다. 집 둘레에 꽃이나 잔뜩 심고 내다보고 싶었다. 헌 집 허무는 목재를 구해와 기둥을 삼고 황토에 짚을 썰어넣고 두어 달 만에 뚝딱 지었다. “이 고장 황토가 좀 좋아? 여름에 개운하고 겨울에 포근하니 더할 나위 없지. 그런데 초가 지붕은 못 견디겠더라고! 벌레가 말도 못해. 노린재가 냄새를 피워 싸서 살 수가 없어. 한 2년 살다 짚을 벗겨내고 강판기와로 바꿔부렀어. 지붕을 걷으면서 굼벵이가 한 말은 나왔을걸. 전부 매미 유충이지. 그놈들이 땅속에 안 내려가고 초가지붕 아래서 살더라고!”

살림은 단출하디 단출하다. 1989년에 고창에 내려왔으니 혼자 산 지 25년째. 그러나 허투루 짐을 늘리지 않았다. 오로지 시를 생각한다. “남에게 보이려고 쓰는 건 아니야. 나 좋자고 쓰지. 혼자 읽고 있으면 참 좋아. 시는 억지로 쓸 수는 없거든. 시신이 접신을 해야 나오는 거지. 요새도 한 달에 두 편 정도는 꾸준히 써. 아흔 넘어까지 시 쓰는 사람은 황금찬하고 나밖에 없을걸. 시바타 도요라든가, 99세 일본 할머니가 쓴 시도 읽어봤어. 별 재미는 없더군.”

본채는 3칸이지만 손이 오면 묵을 방이 필요할 듯해 아래채로 1.5평을 더 지었다. 그런데 묵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방문 앞엔 작은 툇마루를 뒀고 뜰에도 평상을 놓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죽 거기 앉아서 앞산을 본다. 앞산엔 조부모와 부모의 산소가 있다. “여기 사는 건 말하자면 시묘살이야. 저기 하얗게 보이는 게 비석이고 상석이거든. 할아버지·할머니, 아버지·어머니, 형님·형수님이 다 저기 계시잖어. 가을 되면 저 산이 온통 국화로 뒤덮여. 나도 곧 저리로 가겠지.”

앞산에 부모·조부모 산소 있어 시묘살이

질마재에 살고 있는 미당의 동생에게 나는 정말 묻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질마재는 세계문학사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신화적이고 원시적인 공간이다. 상상만으로 탐미적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이다. 게다가 행정명도 선운리다. 신선과 구름은 도무지 이승의 이름들이 아니지 않은가. 질마재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오줌줄기가 뜨거운 이생원네 마누라, 소박맞은 한물댁, 다홍치마와 초록저고리를 입은 채 첫날밤에 재가 된 신부, 마당에 들어온 바닷물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외할머니, 똥오줌 항아리를 거울삼아 머리를 빗질하는 상가수-는 우리 정서의 원형질이고 실제로 고샅 너머에서 툭툭 튀어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 그렇게 우리는 미당 시의 아름다움 앞에 전율한다.

그러나 ‘한국어가 감당할 수 있는 감각의 가장 아스라한 경지’(고종석)에 도달했다는 것을 아무도 반론하지 않는 채로 미당은 지금 우리에게 고통이고 원죄다. 미당 시를 사랑하는 시인들이 미당문학상을 아프게 거부한다. 앞으로도 미당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폄훼와 상찬이 뒤섞일 것이다. 그런 형을 아우는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입을 떼면 미당을 편든다고 할 거 아냐. 근데 말이야. 44년에 미당이 고창경찰서에 잡혀가 있었어. 동네청년들이 연극을 했는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나봐.

누구의 영향을 받았느냐고 캐물으니까 서정주라고 불었나봐. 옥살이를 경험해보니 더 살아남고 싶었겠지. 일본에 아양을 떠는 게 진심이었겠어? 미당이 가장 아끼는 동생이 나란 말이야. 45년 3월에 소집영장이 나왔어. 그걸 들고 미당이 배상기라는 가야금 명인과 같이 날 찾아왔드라고! 초조했겠지. 동생이라도 살려놓고 보자 싶었겠지. 보신책의 일환으로 몇 편의 친일 작품을 쓰면서 아부를 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했을 거 같어.”

상처를 들쑤시는 건 서로 고통스럽다. 대신 선운리 얘기를 하자. “지금 말고 꽃 피고 새가 울거든 술 한잔하러 와. 술은 은근히 취해야 해. 독한 술 말고 복분자술이 젤 낫지. 복분자도 선운리 것이 제일 달아. 고창이라도 다른 동네 것과는 달라. 우리는 외가가 여기야. 아버지는 심원면 사람이고! 선운사는 신선 선(仙)자가 아닌 참선 선(禪)자를 쓰거든. 그 절이 있는 산은 또 도솔산이야. 그래 그런지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정 많고 놀기를 좋아해. 부자가 없고 벼슬도 못해. 가난한데 다들 인정이 많아.”

우하 선생에게 날 데려간 이는 고창 봉암초등학교의 최석진 교장이었다. 해송이 자라는 너른 운동장과 별채로 아담한 도서관까지 가진 봉암초등학교는 한때 전교생이 1000명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학생 수가 35명밖에 되지 않는다. 최 교장은 아토피로 고생하는 도시 아이들을 위해 해풍과 햇볕과 황토집과 편백나무와 너른 운동장을 제공하고 싶어했다. “이런 자연 속에서 한 달만 뛰어놀면 아토피는 너끈히 잡을 수 있습니다. 답이 뻔히 보이는데…. 이 좋은 학교를 비워두고 놀리는 건 너무 아깝습니다.” 무진장한 햇볕과 바람과 숲을 아이들의 놀이터와 치유처로 삼는 작업은 지역 기업인 ‘고창황토’의 도움을 받아 지금 착착 진행 중이다. 그 최교장의 뜻과 꿈이 드높아보였기에 그가 가장 존경하는 ‘어른’을 만나러 간 길이었다. 그럼 생전에 미당은 아우의 시를 어떻게 평했을까. “미당은 칭찬에 인색했어. 47년 내가 조연현이 하던 ‘예술부락’에 시를 발표하고 48년 모윤숙이 하던 ‘문예’라는 잡지에 매월 시를 실었거든. 미당은 뭐 두세 달에 한 번 싣는 정도야. 6·25가 날 때까지 미당과 공덕 집에 함께 살았지. 집에 여류시인들이 오면 미당을 안 보고 자꾸 나를 봐. ‘누구야?’ 물으면 ‘내 아우야. 나보다 미남이지?’ 해. 내가 미당보다 얼굴이 잘생겼거든. 그게 질투가 나서 칭찬을 안 했나 봐. 하하.”

“울타리 전부가 해당화, 꽃 피거든 와”

우하에게 들은 흥미진진한 얘기를 어찌 다 옮기랴. 사람은 모름지기 90 넘게까지 살고 볼 일이다. 역사와 문학과 리얼다큐가 압축된 서사가 섬세하고 담백하고 유쾌한 터치로 종횡무진 풀려나온다. “내 얘기 들으려면 2박3일로는 모자라. 내 첫 직장이 어딘 줄 알아? 미 군정청이야.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썼어. 거기 301호실이지. 미군들에게 노린내가 나서 못 견디겠드라고!” 초가집에서 노린재가 노린내를 풍기듯 미군들도 우하에겐 그랬나보다. “46년에 민주일보를 창간해서 그리로 갔지. 상해임시정부에서 온 분들이 만든 신문이지.

김규식 박사가 회장이고 임정 선전부장 하던 엄항섭이 사장이야. 사회부장 김광섭, 정경부장 오종식, 문화부장 안석주, 문화부 차장 김광주야. 김광주는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로 임정에서 왔지. 정경부 기자 김동리, 사회부 기자 조연현, 문화부 기자 서정태였지.” 곧 폐간되고 전쟁이 나고 수복 후 서울이 정떨어져서 전주로 내려왔다. 왜 하필 전주에? “전주가 물이 좋아서 술맛이 좋았거든. 그리고 기생이 있었어. 술 따르는 기생이 아니라 풍류를 아는 기생! 창을 하고 시를 짓고 기악을 하는 기생이 다른 곳엔 없어도 전주에는 바글바글했거든.” 나는 정말 아랫방에 묵으며 2박3일 우하 선생의 이야길 듣고 싶었다.

그런데 우하 선생이 말린다. 해당화가 피거든 다시 오란다. “울타리 저게 전부 해당화야. 문을 열어놓으면 향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미당 생가에 구경 온 여자가 있으면 불러세워놓고 말해. ‘거 해당화 한 이파리 따 먹어보오!’”

시는 저 멀리 아득한 높이에 있지 않다. 우하에게 와서 그대로 삶이 되었다. 슬하에 2남2녀, 손주도 여덟이다. 그 손주들이 의사에, 회계사에, PD라고 자랑하지만 자식들과 함께 사는 것은 절대 사절이다. “나를 혼자 두는 것이 효도야. 인간은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사는 거지. 그 바탕에 깔린 것이 정인데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정을 시로 쓸 거야.” 집 뒤란엔 서걱이는 대밭, 뜰엔 햇볕과 적막. ‘무엇을 더 바라랴/ 무엇을 더 보랴’(우하 선생의 시 ‘어떤 풍경’)

뭇국과 김 두 장으로 밥을 먹은 우하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앞산을 바라본다. “그래서 절대 자유를 얻으셨나요?” 나는 어쩐 일인지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허, 그게 맘대로 되나? 몸뚱어리가 있는 걸.”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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