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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잃어버린 손글씨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손글씨와 시나브로 멀어지고 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자판의 글쇠를 누르고 있으니 종이에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다. 업무상 연락은 거의 스마트폰 메시지나 사내 메신저, e메일을 통해서 한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메모지에 적거나 다이어리에 회의 내용을 쓰는 일이 전부다. 손글씨와 멀어질수록 악필이 돼 간다. 막상 펜을 들어 또박또박 글을 쓰려 해도 자꾸 획이 비뚤어지거나 날아간다. 이따금 남에게 내 글씨를 내밀어야 할 때면 민망한 마음이 든다. 잔바람에도 휙 날아갈 것만 같은 삐뚤빼뚤한 글씨. 간혹 ‘이거 뭐라고 적으신 거예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악필이란 얘기다. 못생긴 내 맘을 들킨 것 같아 기분이 확 상한다. 아, 몇 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워드프로세서가 대중화되기 전에 글씨는 자신의 얼굴로 비춰졌다. 글씨에는 그 사람의 마음과 성격이 드러난다고 여겼다. 그 시절에는 모두들 예쁘고 멋진 글씨를 가꾸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집에 가 봐도 책상 위에 펜글씨 교본 한두 권은 꽂혀 있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공문서를 수기로 작성하던 때였으니 뛰어난 서체는 남이 부러워하는 훌륭한 능력이었다. 연애편지를 잘 쓰려면 상대를 녹이는 감칠맛 나는 문장뿐만 아니라 필적도 중요했다. 아무리 문장력이 뛰어나도 괴발개발 써 놓은 편지는 읽을 기분조차 들지 않는다. 연애를 잘하려면 펜글씨를 배우거나 멋진 글씨체를 소유한 친구에게 대필이라도 시켜야 했다. 손편지로 사랑을 전달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예전의 나는 명필도 아니요, 악필도 아니었다. 서예학원을 다녔던 경험도 있었고, 글씨를 반듯하게 쓰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던 탓이다.

 붓글씨를 쓰던 조선시대에는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과 학식까지 상징했다. 학문이 뛰어난 학자는 대개 명필이었다. 유학자들은 명필가와 친교를 맺으려 했고, 글씨 한 장을 얻으려고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곤 했다. 자유분방한 사상을 가졌던 조선의 허균도 명필 앞에서는 늘 고개를 조아렸다. 조선의 삼대 명필인 한석봉이 ‘천풍해도(天風海濤)’라는 네 글자를 보내주자 허균은 너무 기뻐서 이를 벽에 걸어두고 삼일 동안 그 아래서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허균이 황해도 수안의 수령을 지낼 때는 한석봉이 언제든지 와서 일필휘지로 붓글씨를 쓸 수 있도록 한 말이나 먹을 갈아놓고 값비싼 명주를 펼쳐놓은 채 그를 기다렸다. 가을에 만나자던 한석봉이 갑자기 숨을 거두자 허균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늘이 보살피지 않아서 우리 어진 사람을 앗아갔네’라는 내용의 제문을 지어 바쳤다. 허균은 한석봉의 글씨를 단지 시대를 놀라게 하는 명필이 아니라 수양으로 쌓아올린 지고지순한 인격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붓을 잡아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심혈을 기울였던 시대는 먼 옛날이 되었다. 이제는 가볍게 누르고 빠르게 터치하는 시대다. 십대 아이들은 펜보다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게 익숙하다. 펜을 잡고 글을 쓰는 공력을 적게 들여서인지 상대적으로 종이 위의 글씨는 예쁘지가 않다. 아이들 공책을 보면 예전처럼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적은 필체는 그리 많지가 않다. 대신 스마트폰 액정을 터치하는, 손가락 동작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현란하다. 그러나 현란한 동작으로 써내려간 글자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문법의 파괴는 애교로 받아줄 만한데 난무하는 상소리와 욕설은 참기가 어려울 정도다. 자신의 생각과 상대의 감정은 헤아릴 겨를도 없이, 그저 내뱉기에 바쁜 글씨들이었다. 과연 연필로 꼭꼭 적어서 보내는 글씨였다면 저런 상스러운 내용이 담길 수 있었을까. 아이들의 거울인 어른들은 그 이상이다. 각종 인터넷 기사에는 익명성에 숨어서 근거 없이 남을 비방하고 욕하는 댓글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붓으로 천천히 썼다면 저렇게 못된 악플을 지어낼 수 있을까. 가볍고 빠른 터치로 글을 쓰는 우리는 오직 손글씨만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진정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의 고상한 인격과 따뜻한 마음일지 모른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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