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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세상 달라진 줄 모르는 국정원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17년 전 수습기자 때다. 야근 중이었는데 일가족이 교통 사고를 당해 모두 사망하는 사고가 터졌다. 빨리 가족 사진을 구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사건·사고 기사에 얼굴 사진을 넣는 게 필수였던 시절이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재빨리 모범택시를 잡아타고 사고 가족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가족 전체가 참변을 당했으니 집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마감 내에 사진을 못 구하면 ‘상부’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할 수 없이 열쇠수리공을 불러 문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곧바로 수리공이 오긴 왔는데 귀가하던 옆집 주민에게 들키는 바람에 주거침입은 미수로 끝났다. 지금 생각하면 처벌당해도 할 말 없는 몰지각한 짓이었다. 그러나 당시 언론계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면 ‘적당한 수위’의 주거침입이나 절도·신분사칭 등은 눈감아주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언론사마다 비합법적 루트를 동원한 전설적인 특종 무용담이 차고 넘쳤다. 그런 시절이다 보니 새파란 수습이 겁도 없이 빈 집 문을 따겠다고 덤빈 거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아무리 공익적 목적의 특종 보도라 해도 취재 과정에 불법이 개입된 사실이 드러나면 법적 제재를 면키 힘들다. 아무도 해당 기자에게 잘했다고 하지 않는다. 불법적 취재를 시키는 선배도 없고, 시킨다고 따를 후배도 없다.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의 핵심은 절차적 정당성에 있다는 인식이 뿌리내린 덕분이다. 지금도 언론이 이래저래 욕을 많이 먹긴 하지만 최소한 취재 윤리규범이란 측면에선 과거보다 크게 나아졌다고 믿는다.



 이번 국정원의 간첩 증거조작 사건 파문을 접하면서 머릿속에 17년 전 일이 오버랩됐다. 그러면서 아직도 세상 달라진 줄 모르는 조직이 있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국정원이 음지에서 일하다 보니 바깥 세상의 달라진 공기를 아직 호흡하지 못한 걸까. 지금까지의 정황을 종합하면 국정원 대공수사팀은 탈북자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조작된 중국 측 출입경기록을 재판부에 제출했으며, 일부 요원들은 제출 전에 이미 서류 위조 사실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건 민주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중대한 국기문란이자 대한민국 사법질서에 대한 테러나 마찬가지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의원들조차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판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증거 조작이 과연 이번 한 번뿐만이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어 더욱 심란해진다. 전적으로 개인적 추측이지만 혹시 대공수사팀엔 ‘상부’의 독촉이 심해지면 적당히 물증을 위조하는 관행이 오래전부터 내려왔던 건 아닐까. ‘간첩’을 때려잡자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적당한 수위’의 불·탈법은 용인하는 분위기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국기문란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파헤쳐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까지 각오해야 한다. 그래야 국정원도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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