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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로맨스 소설에 빠져 산다는 40대 워킹맘



Q 초등 6학년생 딸 하나를 둔 43세 주부입니다. 출판사 편집자이기도 합니다. 업무에 집안 일까지, 지금까지 정신없이 달리기만 해서인지 주변에서는 늘 너무 지쳐 보인다고 이야기하네요. 올해 들어 갑자기 달달한 로맨스가 너무 그립습니다. 물론 진짜 누군가를 사랑할 용기는 없습니다. 대신 로맨스 소설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처음엔 업무로 접했는데 이젠 집에서까지 스마트폰으로 계속 로맨스 소설을 읽습니다. 로맨스 소설 읽을 때면 남편은 물론이요 아이 생각도 잘 안납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요즘 예뻐졌다란 말을 듣습니다. 상상 속 가짜 연애도 진짜 연애같은 효과가 있는 걸까요. 무엇보다, 로맨스 소설에 빠진 게 정상인가요.

로맨스 소설만 읽었는데 … 진짜 연애 하듯 예뻐졌다고요?



A 편집증이라고 하면 무언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을 떠올리는데 정확히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망상을 가진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서 망상장애라고도 부르죠. 망상은 꼭 망상장애뿐 아니라 다른 정신질환에서도 나타납니다. 거짓 내용을 만들고, 이를 믿는 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외계인이 내 머리에 전자 칩을 넣어 도청하고 있다’라는 식의 비현실적 상황을 실제로 믿는 거죠. 과거 정신분열증이라 불렸던 조현병에서 흔히 보이는 망상의 형태입니다.



 망상장애의 망상은 조현병의 망상과 달리 황당한 내용이 아니라 현실적입니다. 얼핏 듣기엔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도 흔합니다. 의처증·의부증이 망상 수준에 이른 경우를 떠올리면 됩니다.



 한번은 67세 여성이 혼자 병원에 왔습니다. 70세 남편이 30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겁니다. 집을 비웠을 때 그 여자가 집까지 찾아온 걸 알고는 충격을 받아 잠도 못 자고 우울하다는 거죠. 못된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이 딱해보여 위로는 물론 마음이 편해지는 약물도 처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외래진료 때 와서는 “그 여자를 봤다”며 “우리 남편이 아직 멋있기는 하다”라는 겁니다. 직감적으로 이상하다 싶었죠. 그래서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여자를 어디서 봤느냐, 집에서 실제로 본 게 맞느냐 등등을요. 결론은 망상이었습니다. 처방약물을 망상을 조절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그 환자가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이젠 마음이 편해졌다”며 “남편이 다 실 토하고 다시는 바람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망상이 호전되면 그간 자기 생각이 허구였다는 걸 알 것 같은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위 사례처럼 바람 피우던 남편이 더 이상 바람 피지 않는다는 정도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습니다. 노년기에 망상장애나 우울증, 또는 퇴행성 뇌 질환으로 배우자가 부정(不貞)을 저지른다는 망상을 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이럴 때 망상이라는 걸 정확히 알려주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망상 자체는 신경생물학적 증상이기에 약물을 쓰면 호전됩니다. 그렇다면 망상의 내용은 어떨까요. 심리학적으로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고 봅니다. 어찌 보면 배우자가 부정을 한다는 망상은 스스로 창작하는 독한 로맨스 소설이 아닐까요. 이런 겁니다. 30대 젊은 여자가 좋아할만큼 70세 남편이 아직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하는 거죠, 그런 매력적인 남자의 아내인 내 가치도 함께 올라가니까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엔 창피하기에 무의식이 슬쩍 스토리를 틀어 버리는 겁니다. 치정 사건으로 말이죠. 스스로를 피해자, 즉 위로받아야 할 캐릭터로 만드는 겁니다.



 ‘남편이 실토하고 더 이상 바람 피우지 않는다’란 말엔 멋진 남자가 젊은 여자를 버리고 다시 나를 택했다는 뿌듯함이 담겨 있습니다. 부정 망상은 결국은 사랑에 대한 결핍과 보상 욕구에서 시작한 것이기에 허구라는 걸 알게 되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자에게 굳이 허구였다고 밝히지 않는 겁니다.



 아, 로맨스 소설에 빠지는 건 병적인 망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과 심리적으로 하나가 돼 소설을 읽는 순간에는 마치 내가 연애하는 것 같은 감성을 리얼하게 느끼니까요. 로맨스 소설만 읽었는 데도 진짜 연애하는 것처럼 얼굴이 환해지는 이유입니다.



 꼭 현실 속에서 행복해야 진짜 행복한 걸까요. 아닙니다. 현실 같은 허구에서 행복을 더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감성 시스템은 현실과 환상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소설이나 영화·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건 이런 이유입니다. 만약 소설을 읽으면서 나랑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여긴다면 몰입하긴 어렵겠죠.



 사연 주신 분, 아마 주변 사람들에게 로맨스 소설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한다고 하면 다들 ‘네 나이가 몇인데’라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나이 보다 어린 행동을 하는 것을 퇴행이라고 하죠. 망상도 심각한 퇴행 현상의 하나입니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어린 아이의 사고 체계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니까요.



 자아가 봉사차원에서 일부러 해주는 퇴행(regression in the service of ego)이라는 복잡한 말이 있습니다. 이 능력이 클수록 예술가적 기질이 큽니다. 망상 같은 병적 퇴행은 자아 기능 자체가 손상된 것이지만, 언제든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 건강한 퇴행은 예술적 체험이고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예술과 문화를 깊이 즐긴다는 것도 어찌 보면 논리적인 현실 세계에서 떠나 잠시 감성적인 환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건강한 퇴행입니다.



 전 로맨스 소설에 빠져 있는 이 여성이 부럽습니다. 문화를 제대로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생과 현실은 항상 완벽하지 않고 결핍이 존재하기에 위로받을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이 발전돼왔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와 일본의 1인당 연평균 독서량이 각각 11권, 12.7권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2.7권이라고 합니다. 사소한 삶의 변화만으로도 엄청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 잔의 커피와 함께 하는 한 권의 책, 어떠신가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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