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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중·일엔 없는 선비의 공론정치, 조선 500년 버틴 힘인가

같은 유교문화권이지만 성리학의 영향, 특히 공론(公論)의 강도는 조선·명·에도막부가 달랐다. 에도막부에선 5~6명의 로주(대신)가 비밀 회합으로 대소사를 결정했다. 공론은 없었다. 황제의 권한이 강했던 중국에선 공론이 사실상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만 공론을 지켜냈다. 사진은 쇼군이 거주한 옛 에도성(왼쪽)과 명 황제의 거주처였던 베이징 자금성. [중앙포토]
#사례 1=효종 즉위년(1649) 대동법 논쟁이 벌어졌다. 우의정 김육이 “먼저 호조에서 시험해야 한다”고 소를 올렸다. 좌의정 조익, 연양군 이시백은 찬성. 이조판서 김집, 호조판서 이기조와 정세규는 반대. ‘떠르르한’ 선비들인 김상헌·송시열·송준길·김경여도 반대의 각을 세웠다. 반대의 표면적 이유는 백성의 불만이었지만 실제론 토지 상실을 두려워한 기득권의 반발도 깊었다. 조정 안팎의 논쟁은 치열했다. 그래도 효종은 강행했다. 논쟁은 계속됐다. 1654년 효종이 송시열에게 물었다. 송시열은 “대동법은 좋은 법”이라 답했다. 5년에 걸친 논쟁은 그쳤다.

한국문화대탐사 ⑧ 선비<下>

#사례 2=에도(江戶)시대 말기인 1841년 ‘덴포(天保)의 개혁’이 발표됐다. ▶사치 금지 ▶검약 ▶이자 인하 ▶에도의 농촌 출신 귀향 조치 ▶가부나카마(株仲間독점적동업조합) 폐지 ▶에도·오사카 주변의 다이묘·하타모토 영지를 막부 직할지로 귀속 등이었다. 이 조치로 막부 지배체제는 강화되지만 해당 지역에 영지를 둔 하타모토의 타격은 컸다. 반발이 커져갔고 이를 추진한 로주(老中조선의 대신 격) 미즈노 다다쿠니는 파면됐다. 그에게 무사와 상인들은 돌을 던졌다. 그런데 어떤 대화가 지도부 사이에 오갔는지는 기록이 없다.
대동법, 덴포 조치 모두 개혁이었지만 조선에선 성공, 일본에선 실패다. 개혁 사례 하나만으로 양국을 비교할 순 없다. 그러나 논의 양상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에선 ‘공론’이 있지만 일본에선 찾기 어렵다. 중국에선 어땠을까.

#사례 3=명나라 만력(萬曆) 원년(1563년)이후 10년간 장거정은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고성법으로 관리의 업무를 철저히 감찰·평가하고 감시했다. 전국 토지를 측량해 지방 호족의 불법 경작지를 몰수하고 세법을 정리했다. ▶사적 서원 설립의 불허 ▶이단 사설의 금지 ▶유생의 정치 간여 금지 조치도 내놨다. 그런데 고성법은 탄핵을 맡은 언관의 입을 틀어 막았다. 아침에 결정된 일이 저녁이면 실행돼야 하는 환경에서 공론은 사라졌다는 비판이 제기됐다(『명사(明史)』 권23, 장거정 전). 16차례 탄핵이 올라왔지만 주도자는 대부분 처벌받았다. 남경의 급사중 여무학은 삭탈 관직됐고, 어사 부응정은 변방으로 쫓겨났다. 어사 유대는 곤장 100대를 맞고 변방으로 쫓겨났다. 어사는 언로를 맡은 이들이다.

성리학을 존중한 조선·명·에도막부 가운데 핵심 가치인 공론을 가장 철저히 지킨 나라는 조선이었다. 조선에선 폐해론이 나올 만큼 공론을 키웠다. 건국 초기 정도전은 “나라의 책임은 왕에 있지만 언권은 언관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영조 때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300년간 권세를 크게 농간한 자가 없고, 큰 근심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방에서는 선비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청의(淸議)를 일으켜 조정을 감시했다. 유통(儒通)이라 불린 그들의 격문은 수십 일이면 나라를 돌았다. 글을 아는 백성은 상언(上言)을 하고 모르면 신문고를 두드렸다.

에도 시대에도 공론은 있었다. 그러나 엘리트의 폐쇄적 공론이었다. 막부의 중추인 로주가 그 기능을 했다. 병부를 제외한 조선의 6조 판서쯤 되는 이들은 재정·민정·인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에도 시대 통틀어 143명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 전권을 행사했다. 막부 말기에 정사 총재직을 역임한 에치젠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는 “사람들은 귀신을 대하는 것처럼 로주를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초기 쇼군 3대까지 보좌역에 지나지 않던 이들은 1635년 법령이 마련됨으로써 5대 쇼군 때부터 실세가 됐다. 11대 쇼군 이에나리시대의 수좌 로주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1787년 간세이의 개혁을 추진하고 1841년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가 덴포 개혁을 단행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러나 로주는 폐쇄적이었다. 한번에 5~6명끼리만 소통했다. 지식인 혹은 사무라이와의 소통은 없었다. 다이묘 밑에서 ‘관례에 따라 합의제로’ 대소 사안을 처리했을 뿐이다. 합의에 이르기까지 얘기를 거듭해 만장일치를 만들어갔다. 기밀 논의 과정이 새나가지 않게 애썼다. 조선의 실록처럼 일처리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로주의 자격은 3만 석 이상을 가진 후다이 다이묘. 지주여야 했다. 그들도 사무라이였지만 땅이 없는 사무라이는 칼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국사는 로주의 일이었고 다른 이들이 참여할 길은 막혔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다(야마모토 히사후미 『お殿樣たちの出世』). 지난 2월 11일 도쿄에서 만난 게이센(惠泉)여학원대의 사와이 게이치(澤井啓一) 교수는 “일본에선 로주가 나라(번) 운영을 맡아 이끌었으며 그 전통은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가 소개한 일화.

1940년 미국과의 전쟁이 결정된 일왕 어전 회의.

육군 대표=“미국과 전쟁을 하면 해군 중심 전쟁이어서 우리가 결정할 바가 아니다.”
해군 대표=“굳이 전쟁을 하라면 한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성공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패배할 것이다.”

일왕이 시를 읊었다. ‘세계 전체가 형제인데 왜 이런 풍랑이 일까’.

지난 2월 13일 센다이(仙台)에서 만난 도호쿠(東北)대학 가타오카 류(片岡龍) 교수는 “천황의 시는 전쟁 결정을 알리는데 이는 로주 방식이다. 대신들의 결정을 천황이 추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공론 정치를 탄생시킨 나라. 그러나 서울대 최승희 명예교수는 ‘조선 초기의 언관에 관한 연구’에서 “진대 이전까지 언관은 없었다. 한대엔 진의 제도가 원용됐다. 당·송대엔 어사대와 간관 제도가 정비됐지만 청대엔 사라졌다”고 한다. 황제 권력이 강화됐기 때문인데 명말청초의 양명학자 당견(唐甄)은 “군주는 하늘의 상제다. 대신들은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노예만도 못하게 구부리고 앉는다”고 개탄했다. 대만대 황쥔제(黃俊傑) 교수는 “중국의 정치 갈등은 실제론 사대부와 환관의 대결이었다”고 말했다. 대만사범대 판차오양(潘朝陽) 교수도 “현대 중국 공산당의 통치방식은 과거 황제 시대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근대의 조선·명 에도막부 모두 공사를 구별했다. 가타오카 교수는 “공(公)이 무엇인지 중국과 일본에선 황제나 천황·쇼군이 결정했다. 그러나 조선에선 공공(公共)개념이 있어 왕과 선비가 더불어 논의했다”며 “중·일에선 조선과 같은 공론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로주 방식은 근대까지는 잘 적용됐지만 현대에서 한계가 드러나 조선의 공론 방식을 주목한다”며 “300년 미만 존속한일본·중국 왕조와 달리 조선 왕조가 500년 넘게 유지한 것은 당쟁(당의)이라는 공론 형성 과정이 나라 유지에 큰 기능을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조 사후 선비의 붕당과 당의(黨議)라는 공론 시스템이 사라진 자리에 세도정치가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망국의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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