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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힐링투어] 막막한 18년 세월, 다산은 인연 쌓으며 견뎠으리라

다산 정약용이 10여 년 머물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권이 넘는 저작을 남긴 다산초당. 다산학의 산실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연못도 파고 채소도 길렀다. 조용철 기자
“다산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다산을 아는 사람도 없다”던 어느 다산 연구자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나야말로 다산을 모르는 사람이어서다. 다산의 그 거대한 사상계를 나는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나는 한 사람, 인간 정약용을 응시할 따름이다. 어느 날 문득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 세상 끝에 내몰려서도 해야 할 바를 다하다 간 사람, 하여 누구보다 제 삶을 사랑했던 한 남자의 흔적을 간신히 뒤따라가 볼 뿐이다. 다산의 강진 유배살이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⑥ 전남 강진 다산 유배처<下>

둘째 아들과 9개월 머문 보은산방
주막집 행랑채에서 4년을 버틴 다산은 1805년 겨울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거처를 옮긴다. 강진읍 뒷산 보은산 중턱에 고성사(高聲寺)가 있는데, 그 절집 안에 보은산방이 있다. 여기에서 다산은, 잠시 공부하러 내려온 둘째 아들과 『주역』을 공부하며 9개월을 살았다. 다산의 차남이 정학유(1786∼1855), ‘농가월령가’의 지은이다. 핏줄은 이런 데서 증명된다.

다산의 강진살이에서 보은산방이 갖는 의미는 아암(兒菴) 혜장선사(1772∼1811)와 맺은 인연에 있다. 다산이 주막에서 절집으로 옮길 수 있게끔 도와준 인물이 혜장이다. 혜장이 백련사 주지였고, 고성사는 백련사에 딸린 암자였다. 다산과 혜장의 인연은 혜장이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각별하게 이어진다.

보은산 정상이 우두봉(439m)이다. 산에 오르면 강진만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다산도 우두봉에 오른 적이 있다. 다산은 우두봉에 올라 3년 전 나주 율정에서 헤어진 형 약전을 떠올린다. 다산이 오른 봉우리가 마침 형제봉으로도 불렸으며, 형이 갇혀 사는 흑산도는 그 시절 우이도로 통했다.

“절정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나주의 여러 섬이 눈앞에 있었다. 보은산의 다른 이름은 우이산이고, 절정의 두 봉우리는 형제봉이라고도 한다. 형님이 계신 곳과 내가 있는 곳 두 곳 이름이 우이고, 봉우리 이름 또한 형제봉이니 우연만은 아니었다”(‘보은산 절정에 올라 우이도를 바라보며’의 한 부분).

보은산에서 내려온 다산은 강진읍 목리 이학래의 집에서 2년 넘게 얹혀 살다가 도암리 귤동마을에 있는 외가의 외딴 산정(山亭)으로 처소를 옮긴다. 이학래는 다산이 주막에서 더부살이할 때 제자로, 훗날 추사 문하로 들어간 인물이다. 다산의 외가 해남 윤씨 문중의 귤동리 산정은 다산이 들어간 뒤로 새 이름이 생긴다. 다산초당(茶山草堂). 다산이 강진에서 일곱 번째 맞는 어느 봄날이었다(1808).

천일각에 서면 강진 앞바다가 한눈에
다산은 초당에서 1818년 9월 해배될 때까지 10년 넘게 산다. 그 10년 동안 다산은 500권이 넘는 저작을 남긴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다산의 주요 저작 대부분이 이 외진 산정에서 생산된다. 다산초당은 다산학의 산실이다. 초당이 있어 강진은, 비로소 다산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의 저작은 솔직히 다산 혼자만의 성과가 아니었다. 이학래·황상 등 사의재 시절의 제자와 해남 윤씨 자손으로 이뤄진 제자 18명의 공이 컸다. 사의재에서 연이 닿은 주모의 딸, 그러니까 홍임 어미도 귤암마을로 들어와 다산과 다산의 제자들을 뒷바라지했다. 다산이 늘그막에 딸 홍임을 본 것도 초당에서였다.

귤동마을에서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뿌리의 길.
귤동마을에서 다산초당까지는 비탈을 따라 오붓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짙은 그늘 아래로 늙은 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산길이다. 이 길을 시인 정호승도 걸어서 올랐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 지하에 있는 뿌리가 /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정호승 ‘뿌리의 길’).

다산초당은 문자 그대로 조그만 초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번듯한 기와집이다. 1958년 해남 윤씨 집안이 중심이 된 다산유족보존회가 초당을 복원하면서 기와를 얹었다. 다산초당은 세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자들이 기거했던 서암과 학문을 연구했던 초당, 그리고 다산이 머물렀던 동암이다.

초당 왼편에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긴 바위가 서 있다. 다산이 새겨 넣었다고 한다. 초당과 동암 사이에는 작은 연못도 있다. 다산이 초당에서 연못도 파고 손수 채소도 길렀다지만, 지금의 연못과 채마밭은 모두 후세에 복원한 것이다. 동암 오른편의 천일각도 1978년 세운 누각이다. 천일각에 서면 강진만 구강포 앞바다가 펼쳐진다. 다산도 여기 어느 바위에 걸터앉아 구강포에 내려앉는 노을을 바라봤을 것이다. 하염없이 바라보다 남몰래 눈물 훔쳤을 터이다.

다산 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오솔길. 다산은 이 길을 걸어 백련사 혜장선사를 만나러 갔다.
유교·불교 만나던 다산초당~백련사길
천일각에서 북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1시간 가까이 산길을 걸으면 백련사가 나온다. 초당의 다산이 걸으면 ‘백련사 가는 길’이 되고, 백련사 혜장이 걸으면 ‘다산초당 가는 길’이 된다. 두 사람은 무던히도 이 길을 걸으며 친분을 쌓았다. 다산이 한밤에 횃불 앞세우고 걸었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이 오솔길은,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이어지는 퇴계의 예던길과 더불어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지성의 길이다. 선비와 승려가 오간 길이었으니, 유교와 불교가 만난 길이다.

다산은 저보다 열 살 아래인 혜장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엇보다 차(茶)가 있었다. 유난히 차를 아끼는 선비였지만 차 덖는 법은 몰랐던 모양이다. 다산이 차가 떨어졌으니 어서 차를 달라고 혜장에게 강짜를 부리는 편지가 남아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여러 일화가 있었지만, 가장 울림이 큰 건 혜장이 훌쩍 가고서 다산이 쓴 만시(輓詩)다.

“이름은 중,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 /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 … /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거느린 만덕산(408m)은 야생 차가 많아 예부터 다산(茶山)이라 불렸다. 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 후미에도 너른 차밭이 있다. 차밭을 지나면 차밭만큼 넓은 동백나무숲이 있고, 숲을 가로지르면 천년 고찰 백련사 경내에 접어든다.

강진에 가면 한 사내의 울분 어린 18년 세월이 흩어져 있다. 나로서는, 그의 신산(辛酸)했던 삶보다 그가 여기서 맺은 인연이 더 눈에 밟힌다. 어차피 사는 건 인연을 쌓는 일이다. 인연이 있어 그 사내도 막막했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남양주 고향집으로 돌아간 다산은 18년을 더 살다가 74세를 일기로 숨진다. 음력 2월 22일이었으니, 올해는 3월 22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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