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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의 시대공감]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수필은 언제 읽어도 담백하면서도 단아한 맛을 준다. 아사코와의 절제된 애절함이 있는 ‘인연’이나 청자(靑瓷) 연적을 비유로 든 ‘수필’도 좋지만, ‘나의 사랑하는 생활’도 그 못지않다. 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오만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 돈으로 하고 싶은 일 여러 개를 글에서 언급했지만, 그중에서도 ‘적조해진 친구들을 집으로 청하고 아내는 신이 나서 도마질을 할 것’이라는 대목이 특히 정겹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린스턴대의 카너먼과 디턴 교수는 몇 해 전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미국인 45만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는데, 연간 소득이 7만5000달러 수준으로 늘어날 때까지는 행복감이 커지지만 그 이상 증가하면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 돈으로 하면 연봉 9000만원에도 못 미치는 소득인데…”하며 동의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왜 우리는 그 정도 소득으로는 행복하지 못할 거라고 느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여러 이유가 떠올랐다. 우리 사회 게임의 룰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믿기 때문일까. 돈을 많이 쓰지 않아도 행복을 느끼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일까. 치열한 경쟁과 야근 ‘권하는’ 직장문화에 매몰되어 가족이나 좋은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어떨까. 무엇보다 동일한 소득이더라도 금아 선생이 이야기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은 아닐까.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고정비성 의무지출이 많으면 ‘실질’ 가처분소득이 줄고 가계의 구매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내 집 마련을 위해 집을 담보로 제공하고 대출을 받아야 하는 구조에서 매월 내야 하는 이자지출 같은 것들이다.

가계부채 1000조(兆) 시대, 그중 주택담보대출이 500조원 넘는 현실을 생각하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전세난 때문에 살고 있는 전셋집을 월세로 돌릴 경우 내는 집세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사교육비 지출도 그렇다. ‘학벌 위주 성공 트랙’ 구조하에서 어떤 부모가 자식을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는 데 돈을 아끼려 할까. 또한 체면치레를 위한 경조사비, 최근 가계에서 늘어난 통신비 지출도 점차 의무성 지출이 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것들은 거의 ‘악’ 소리도 못하고 소득에서 ‘원천징수’ 당하는 경비다.

가계나 기업에 강제적인 비용을 유발시킨다는 점에서는 규제도 빼놓을 수 없다. 규제의 다른 이름은 경제주체 누군가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다. 결국 사회의 비효율을 국민이 소득에서 돈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답은 자명하다.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소득을 늘리는 동시에 가계의 고정비성 의무지출을 줄여 ‘실질’ 가처분소득을 높여야 한다. 문제는 답을 알면서도 풀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특히 가처분소득을 늘리는 문제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개별 정책이 아니라 제도를 바꾸는 접근이 필요하다. 집세나 금융비용은 부동산 임대와 주택금융 시장을, 사교육비는 입시와 공교육제도를, 그리고 규제비용은 규제만능주의에 젖은 공공부문의 정책 결정구조부터 변화시켜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더해서 이미 기득권이 형성된 사회의 인센티브 구조를 변화시키고 오랫동안 관행으로 굳어진 비정상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험난하고 먼 길이다. 그렇지만 정부뿐 아니라 정치권, 기업, 시민사회 등 사회 구성원 전체의 합의와 실천을 통해 꼭 가야만 하는 길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money buys happiness)’ 두 경제학자의 연구 첫 문장에 나오는 질문이다. 물론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그러나 필요조건 중 하나로 ‘어느 정도’의 돈은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 척도는 명목소득이 아니라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금아 선생과 동일한 글제를 받는다면 첫 문장을 요새 버전으로 다시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 같다. “나는 우선 의무성 경비를 다 제(除)하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오십만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고.



김동연 국무조정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과 예산실장,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을 지냈다. 상고 졸업 후 은행과 야간대학을 다니며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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