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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한비야' 꿈꾸지 말라 … 제1의 영희, 제1의 철수 돼라

아프리카 가나 아이들의 사진을 들고 있는 한비야씨. “체력이 되는 한 늘 구호현장과 함께하겠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거침이 없다. 당당하다. 자기 일에 대한 확신이 넘친다. 3일 만난 한비야(56)씨는 미용실 얘기부터 꺼냈다. 인터뷰 촬영을 위해 미용실에 들렀는데 미용실 주인이 “좋은 일을 한다”며 재능기부 차원에서 50%를 깎아줬다는 것이다.

박정호의 사람 풍경 - 유엔 자문위원 한비야



 “택시비를 안 내는 경우도 많아요. 극구 사양을 해도 기사분이 ‘내 마음이다’라며 그냥 내리라고 하죠. 전 그 택시비를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에 기부하고요. 거리에서 아이들 돈도 받은 적이 있어요. ‘급한 데 써라. 왜 해외를 도우려고 하니’라고 하면 ‘그쪽이 더 급하잖아요’라고 대답해요. 요즘 애들 이기적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나 훌륭해요. 한국 사회도 몰라 보게 달라졌어요.”



 이 정도면 웬만한 대중스타를 뺨친다. 그럴 만도 하다. 지구촌 난민 이야기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2005)와 『그건 사랑이었네』(2009)가 각각 100만 부, 70만 부 넘게 나갔으니 말이다. 그를 세상에 알린 오지 여행기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1996)도 있다.



 그래도 한씨를 각인시킨 건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2001~2009) 시절이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짐바브웨 등 지구촌 분쟁지역에서 벼랑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따듯한 영양죽과 사랑을 전달해 왔다. 늘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주는’ 나라로 올라선 한국의 위상을 대변해온 그다.



 8일은 1975년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날. 85년부터는 한국 세계 여성의 날 행사도 열리고 있다. 2010년 여대생 여론조사에서 ‘닮고 싶은 인물 1위’로 선정됐던 한씨의 어제와 오늘을 들어봤다.



 - 최근에는 어디를 다녀왔나.



 “지난해 8월부터 올 1월까지 서아프리카 말리에서 긴급구호 활동을 했다. 정부군과 이슬람세력의 내전으로 난민 50만 명이 생긴 곳이다. 물과 식량 공급, 보건·의료 지원, 피난처 확보가 주요 업무다. 난민촌이 형성 안 돼 오히려 더 힘들었다.”



 - 무슨 말인가.



 “도시가 팽창하면서 집단 난민촌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내전이 한두 달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친척 집을 찾은 이들이 많았는데 친척이라고 잘살 수가 있겠나. 사람들이 축사(畜舍)로 밀려났고, 아이들은 동냥을 다녔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나서야 했다.”



 - 2011년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CERF) 자문위원이 됐다.



 “지구촌에서 가장 지원이 절실한 곳을 돕는 자리다. 1년 운용금이 5억 달러(약 5360억원) 규모다. 총 18명의 자문위원이 있는데 현장을 뛰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다. 나라마다 순번이 있고, 한국의 차례가 아니었는데 여성에다가 현장을 아는 NGO 출신이라는 게 작용했다고 들었다. 올가을에는 시리아로 갈 것 같다.”



 - 항상 씩씩해 보인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친다.



 “제가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늘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산다는 것이다. 저도 지칠 때가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지 않나. 현장에 한 번 다녀오면 진이 다 빠진다. 말리에서 돌아온 다음 일주일간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렇게 지냈다.”



 - 좌절의 순간도 있었을 텐데.



 “중2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살림이 어려워졌다. 등록금 안 낸 사람은 시험을 못 보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고교 졸업 이후 6년 동안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그때의 상처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



 - 충격이 컸었나 보다.



 “사무직 임시 보조원 시절, 당시 계장이 ‘야, 야, 네까짓 것, 커서 뭐가 될래’ 하며 갖은 수모와 멸시를 줬다. 잘릴까 봐 대꾸 한 번 못했다. 어머니가 속상해할까, 말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집에 돌아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기를 썼다.”



 - 뭐라고 썼나.



 “몇 해 전 식당에서 그 계장을 마주친 적이 있다. 그가 먼저 ‘한비야 내가 키웠잖아’라고 하더라. 집에 가서 그때 일기를 들춰봤다. ‘어떻게든 참고 견디자. 이 고비는 넘어갈 것이다. 나는 단단해질 것이다’라고 썼더라. 그 계장이 저를 키운 게 맞나 보다. (웃음) 돈이 없다는 게 사람을 얼마나 상하게 만드는지 절감했다.”



 한씨의 눈가가 순간 축축해졌다. 그때의 슬픔과 분노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올해 세계 여성의 날 주제는 ‘변화, Inspiring Change’, 한국 여성대회의 슬로건은 ‘Jump, 뛰어넘어 희망을 찾자’다. 오지 여행가에서 긴급구호 전문가로, 그리고 유엔 자문위원이자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로 자신의 지도를 확장해온 그와 맞물리는 대목이 많아 보였다.







 - 변화와 점프, 당신의 축소판 같다.



 “시대와 궁합이 잘 맞았다. 운이 좋았다. 2001년 월드비전에 첫발을 들였을 때는 월급도 받지 못할 만큼 사정이 안 좋았다. 그런데 지난해 모금액이 2000억원에 이르렀다. 후원자도 50만 명이다. 얼마나 멋진 변화인가. 10년만 먼저 시작했어도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유엔 자문위원이나 교수도 목표해 본 적이 없다. 열심히 하다 보니 그것들이 내게 다가왔다.”



 - ‘롤 모델’로 꼽는 학생들이 많다.



 “‘제2의 한비야’를 꿈꾸지 않았으면 한다. 뭐가 아쉬워서 저를 닮으려고, 넘버 2가 되려고 하나. 후배들 모두 ‘제1의 영희’ ‘제1의 철수’가 됐으면 한다. 저는 빡빡 기면서 여기까지 왔다. 요즘 환경은 예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좋다. 예전에 본 책 소제목 중에 ‘모두가 한비야는 될 수 없다’는 게 있었다. 틀린 말이다. 모두가 한비야보다 나을 수 있다. 후배들은 제 어깨 위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 모두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아니, 할 수 있다. 누가 할 수 없다고 하나. 한 번도 해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끝까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100도로 끓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할까 말까’ 고민한다면 칼을 뽑아야 한다. 안 하면 0%요, 시작하면 50%를 이룬 것이다. 남을 돕는 것도 그렇다. 처음에는 쑥스럽지만 살짝 한 번 용기를 내면 된다. 돕는 것도 훈련이다.”



 - 당신의 롤 모델이 있다면.



 “지난해 12월 타계한 만델라 같은 얼굴을 갖고 싶다. 발바닥이 닳도록 노력해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의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있다. 만델라는 얼굴만 봐도 평화로워진다. 아프리카에서 직접 겪었는데 그의 장례식은 축제였다. 결혼식 같았다. 철천지원수들도 친구가 됐다.”



 - ‘바람의 딸’이라 불렸다. 지금은 ‘무엇의 딸’이고 싶나.



 “영원히 ‘바람의 딸’로 남고 싶다. 그런데 ‘바람’의 의미가 달라졌다. 바람(wind)처럼 여기저기 다녔다면 앞으로는 바람(hope)의 딸, 바람의 이모, 바람의 할머니가 되려 한다. 딸은 성장 가능성을 뜻한다. 실제로 저는 지금도 크고 있다. 앞으로 뭐가 될지 궁금하다.”



 - 2014년에도 유리천장(glass ceiling), 즉 여성이 넘어야 할 장벽이 높지 않은가.



 “결혼·육아 경험이 없어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여자라서 못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깝다. 그건 우리 할머니·어머니·언니 시대의 얘기다. 지금 20~30대가 그렇게 말하면 되겠는가. 봄이 왔는데 겨울옷을 입고 다니는 꼴이다. 외국에 나가보면 안다, 한국 여성들이 얼마나 슬기롭고 성실하고 열심인지.”



 -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장이라는 직함도 있다.



 “요즘 가장 정성을 쏟는 분야다. 우리 아이들이 국제무대에서 제 몫을 하자는 뜻에서 2007년 시작했다. ‘어려운 지구촌 사람들을 돕자’며 눈물샘을 자극했다는 게 예전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지구집 일원으로 보다 좀 더 시원하게 살자, 모두 나누며 살자’고 가르친다. 패러다임이 달라진 것이다. 제 스스로 ‘주자학파’라고 하지 않나. 그런 뜻에서 세계시민학교는 세상에서 가장 큰 학교다. 지난해에만 초·중·고 36만 명이 참여했다. 교육기관도 1000곳에 육박했다.”



 - 지구촌이 아니라 지구집, 표현이 재미있다.



 “세계는 공동운명체다. 투명유리로 된 집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다 훤하게 보인다. 방음장치가 없어 신음소리도 바로 들린다. 반지하방에서 우리끼리 경쟁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자 세계시민이다. 이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한국을 베이스캠프로 삼되 그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뷔페 음식점에 가서 샐러드만 먹어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그만큼 커졌다. 긴급구호 현장에서 한국은 기적 같은 나라다. 물론 저만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일 수 있지만.”



 -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평소 힘을 얻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고린도 전서 13장 3절)라는 대목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다. 나는 정말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항상 되묻는다. 하느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가 되고 있는지 말이다.”



 - 등산 매니어라고 들었다.



 “저는 산에서 하느님을 본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삶의 모든 지혜가 들어 있다. 산은 일상의 독소를 빼는 휴식처이자 기도처다. 집 근처 북한산은 1500번 정도 오른 것 같다.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봄까지 백두대간도 종주했다. 최근 ‘100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산에서 16번을 잤다. 지난 주말에도 경북 문경 주흘산에서 밤을 보냈다.”



 - 봄학기가 시작됐다.



 “1년 중 상반기는 강의실, 하반기는 현장에서 보낸다. 대학에선 국제구호와 개발협력을 가르친다. 3년째다. 가르치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 땡 잡은 기분이다. ‘배워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다. 아니다, 배워서 남 주는 게 맞다. 하하하. 여러분도 한번 해보시라. 얼굴빛부터 달라질 것이다.”



글=박정호 문화 ·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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