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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명문장 <8> 이광형 KAIST 미래전략대학원장

이광형 원장은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면 료마에게 묻는다. 변하지 않는 미래의 비전을 위해 나를 버리는 길이 무엇인지를.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메이지유신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료마는 교토로 향하는 배 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 이후의 세상을 글로 써나갔다. ‘선상팔책(船上八策)’이라 불리는 미래전략이다. 그러면서 동료들에게 혁명 후의 정치를 부탁했다. 동료들의 놀라는 반응에 료마가 말했다. “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막부 정권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오.”

'자리' 탐하려 막부 정권을 쓰러뜨리는 건 아니오



얼마 후 료마는 자객의 칼에 쓰러졌지만, 그가 그렸던 미래는 동료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 중에서(필요에 의해 원문을 축약했음)



어느새 10년이 넘게 지났다. 2001년 정문술(전 미래산업 회장) 전 KAIST 이사장은 300억원을 맡기며 “새 융합학문을 개척해 보라”고 했다. 나는 그 뜻을 받아 학교에 바이오기술과 정보기술을 융합한 바이오및뇌공학과 설립을 제안했다.



 생소한 융합학과를 만들자고 하자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생물과 컴퓨터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공부를 한 학생이 졸업하면 취직할 곳이나 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난 몇몇 동료와 힘을 합쳐 학과 설립을 관철시켰다. 이전까지 난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늘 내가 우선이었고, 내 연구가 먼저였다. 그때 처음 동료들과 ‘새 일’을 도모했다. 학과장을 선임해야 할 순간이 되자 그들은 나를 바라봤다. 그때 떠올랐던 게 이 문장이다.



 “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막부 정권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오.”



 일본 메이지유신의 설계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료마가 간다』(원제 『龍馬がゆく』)의 핵심 문장이다.



 나는 1980년대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다. 그 시절 서양인들은 동양인을 만나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바라봤다. 유일한 예외가 일본인이었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일본인들은 특별 대접을 받았다. 개개인을 보면 한국인보다 더 나아 보이지 않는데도 그랬다. 궁금했다. ‘일본은 어떻게 선진국이 됐을까. 중국과 조선이 문을 닫고 있을 때 어떻게 먼저 문을 열고 외국과 통상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준 것이 귀국해 읽은 『료마가 간다』였다.



 료마는 태어난 지방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 봉건시대의 악습에 대항해 열아홉 살에 고향을 탈출했다. 떠돌이 무사로 살아가며 서양의 힘을 알게 됐고,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이 서양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내다봤다.



 료마는 그때부터 썩어빠진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고 평화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룰 방법을 고심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막부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설득해 하나로 묶어냈다. 막부 정권은 그 기세에 눌려 무릎을 꿇었고, 천황과 내각이 권력을 분점 통치하는 입헌군주제가 들어서게 됐다. 바로 료마가 꿈꾸던 세상이다.



 인류 역사 속에는 숱한 영웅호걸이 등장한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그 열매를 차지했다. 하지만 열매를 노린 혁명은 또 다른 혁명을 낳았고, 그 가운데 죄 없는 이들이 수없이 피를 흘렸다.



 료마는 달랐다. 메이지유신은 무혈혁명이었다. 혁명 후에 나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혁명을 설계하고 조종하고 성공시킨 료마는 혁명의 열매를 탐하지 않았다. 세상에 한 점 혈육조차 남기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그래서 지금도 그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료마는 33세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영생(永生)의 길을 걷고 있다. 세상을 떠난 지금도 그가 그렸던 미래 속에 살고 있다.



 『료마가 간다』를 읽고 나자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의문이 풀렸다. 19세기 일본에는 료마가 있었고 우리에겐 그런 인물이 없었다. 료마는 바람 앞에 흔들리는 국가의 운명을 내다보고, 국가의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가 자신을 버리자 사람이 모였고, 사람이 모이자 지혜와 힘이 생겼다. 차이는 거기서 비롯됐다. 료마의 차이가 일본을 선진국, 한국을 후발국으로 만들었다.



 료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은 모두 나만큼 똑똑하다고. 그들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힘을 보태지 않는다. 내가 사심(私心)을 품으면 곧바로 알아차린다. 오직 대의를 위해서만 손을 내민다. 그래서 료마는 미래 비전을 제시해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자신은 뒤로 빠졌다.



 나도 료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총장을 만나 “신설 학과의 첫 학과장으로 A교수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총장을 포함해 많은 이가 의아해했다. “기부금을 끌어와 학과 신설을 주도한 주역이 왜 학과장을 다른 교수에게 맡기겠다는 거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학과장 자리를 양보하고 나자 오히려 일이 잘 풀렸다. 융합학과 설립에 반대하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정부가 지원을 해줬고 주위 교수와 학생들도 도움을 줬다. 신생 학과에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가 잇따라 나왔다. 다른 대학에도 비슷한 학과가 여럿 생겼다. 기부금을 줬던 정문술 전 이사장은 최근 또다시 215억원을 맡겼다.



 료마는 그 뒤로도 종종 내게 찾아왔다. 나는 3년 전 학교에 미래전략대학원 설립을 제안했다. 국가의 장기 미래전략을 연구하고 료마와 같은 인재를 기르는 대학원이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책 기조가 바뀌어 정부가 갈지자 행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총장은 “제안자가 책임지고 추진해보라”고 했다. 그때 다시 료마가 말했다. “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막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오”라고.



 이번에도 료마의 말을 따랐다. 총장에게 여러 명의 후보를 추천했다. 하지만 총장이 받아들이지 않아 6개월을 씨름했다. 그러다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고, 더 이상 미루면 학생 선발을 못할 상황까지 몰렸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짐을 지기로 했다.



 그렇게 대학원이 설립됐고 ‘또 하나의 미래’가 출발했다.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한 방향으로 전진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게 목표다. 국가의 미래를 논하는 강의실의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내가 짐을 진 것에 대한 료마의 답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는 어떤 답을 갖고 있을까.





◆이광형=1954년 전북 정읍 생. 서울대와 KAIST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INSA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공지능과 바이오정보 실용화 연구를 하며 학생들과 ‘연구실 창업’을 여럿 성공시켰다. 넥슨·아이디스·네오위즈 등이 이 교수 제자들이 창업한 회사다. 그는 초임 교수 시절부터 고정관념을 깨는 행동으로 유명했다. 머리를 염색하고 스포츠카를 탔고, 지금도 TV를 거꾸로 보고 있다. 99년 방영된 TV 드라마 ‘카이스트’의 괴짜 교수(안정훈 역)의 실제 모델이다. 2001년부터 KAIST 캠퍼스 연못에서 거위를 기르고 있는 ‘거위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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