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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 아픔 담긴 자료 사라질까 조마조마

지난 12일 오후 부산시 수영동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 내부에 전시하지 못한 자료들이 바닥에 놓여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주제로 연설했다. 조 장관은 연설에서 “10대 어린 소녀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당사국(일본)의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정부 관심 필요한 '위안부 사료' 보존



조 장관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많다. 지난달 말 프랑스에서 열린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선 위안부 문제를 다룬 ‘지지 않는 꽃’ 기획전시로 국제적 관심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관련 예산도 크게 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업예산은 지난해 19억6700만원에서 45억8700만원으로 증액됐다.



하지만 위안부 관련 단체들은 “주무부처 장관이 관심을 갖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라면서도 미심쩍은 눈길을 감추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알린 것도, 피해자 할머니들을 돕고 자료를 모아온 것도 민간단체였지 정부가 앞장선 적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이인순 사무처장은 “지난 20년간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움직인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 세월 동안 민간단체들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어요. 정부가 제대로 된 도움을 주려면 민간단체들의 경험을 받아들여서 사업을 진행해야죠. 예산지원은 나중 문제예요. 정부가 민간단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자세를 보여줘야 합니다.”



부산·경남 지역 유일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지만 낡은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해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부산=송봉근 기자
민간단체 힘만으론 사료 보존 한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0년. 36개 여성단체가 모여 만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출범하면서였다. 이듬해에는 고(故) 김학순(97년 작고) 할머니가 세계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정대협은 92년부터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열어 일본군 위안부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같은 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안식처인 ‘나눔의 집’도 처음 만들어졌다. ‘나눔의 집’은 98년 뜻있는 시민들과 기업의 후원으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했다.



지난 13일 찾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현재 생존해 있는 피해자 할머니 열 분의 주거공간인 ‘나눔의 집’ 옆에 지상 2층, 지하 1층 총 344㎡(약 104평) 규모로 들어서 있다.



역사가 오래된 데다 후원층도 두터워 지역단체들에 비하면 사정은 나은 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사료(史料) 보관 시설이다.



역사관 2층 66㎡(약 20평) 남짓한 수장고에는 전시실에 미처 전시하지 못한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목록화 작업이 끝난 물품 일부만 키친타월과 공기완충포장재(뽁뽁이)로 싸여 플라스틱 상자 안에 들어 있고, 대부분의 자료는 방치돼 있다시피 했다.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 10여 점도 마룻바닥에 세워져 있었다.



자료들이 습기와 온도 변화, 벌레 등에 노출돼 있는 것도 문제다. 온도 조절장치라곤 에어컨 1대가 전부였다. 항온·항습 설비가 갖춰지지 않으면 소중한 자료들이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소 자리에서 발견된 군표(전시에 화폐 대신 통용되던 유가증권)와 콘돔을 일본인에게서 기증받았는데 보관시설이 없어 3분의1 정도가 삭아버렸다. 지금은 진공 유리관 안에 넣어뒀는데 보존시설이 마련되지 않으면 더 많은 자료가 훼손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 늘린 예산 가운데 10억원을 ‘나눔의 집’에 배정했다. 올해 건립되는 인권센터와 역사관 리모델링 사업에 쓸 예정이지만 사료 보존을 위해선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



지역단체들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2009년부터 대구·경북지역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추진해 온 대구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사업비 부족으로 번번이 좌절을 맛봤다. 여성부가 올해 2억원의 건립비를 지원키로 했지만 갈 길은 멀다. 건립되더라도 운영비 마련이 막막하다.



시민모임 이인순 사무처장은 “정부가 위안부 관련 예산을 짜면서 제대로 수요 파악을 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사무처장은 “지금까지는 여성부가 생존 할머니들의 생활지원사업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이 분들이 돌아가시고 난 뒤를 생각하면 기념사업이나 자료 보존사업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원·통영지역 위안부 관련 단체들도 지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위안부 피해가 집중됐던 이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담아 역사관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사업비 마련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전임 도지사 시절 지원을 약속했던 경남도가 최근 역사관 건립 지원에 난색을 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 빨리 찾아야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단체들이 정부에 불신을 갖는 건 그동안 정부의 역할이 기대에 못 미쳤던 탓이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정부가 ‘반짝 지원’만 했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것도 불신을 키웠다. 일부 단체들은 “아베 정권이 등장하면서 일본의 우경화가 가속화되자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는 척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갖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유관기관 간의 장벽도 문제다. 부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 운영난 해결방안에 대해 부산시에 문의를 해봤다. 부산시 담당자는 “역사관 운영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면서도 “시 예산에 한계가 있고, 전시물의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 이관 문제도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소관”이라고 말했다.



위원회 역시 예산 부족을 호소했다. 정부 유관기관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 편이었지만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위원회여서 대규모 예산을 따오거나 장기 정책을 추진하기는 어렵단 거였다. 위원회 정혜경 조사1과장은 “김문숙 회장께서 열심히 일해 오신 걸 잘 안다. 하지만 위원회로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부산 강제동원 역사관 자료 이관 문제도 아직 운영 주체가 정해지지 않아 확답을 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국제·외교 부문은 외교부가, 피해자 지원 부문은 여가부가 맡고 있다. 여기에 지자체와 특별위원회 등이 어지럽게 얽혀 있지만 기관 간 조율과 장기정책 수립 등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기구는 없다. 여가부 관계자는 “최근 국제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많이 부각됐고, 국내에서도 관심이 확산돼 국회도 적극적인 대응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앞으로 예산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관성 없는 정책도 문제다.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정치권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때뿐이었다. 사료 보존이나 기념사업, 정부 차원의 기념물 건립 등 관련단체가 요구해 온 정책 추진은 공허한 울림으로 되돌아왔다.



전문가들은 “민간단체가 해 온 사업에 대해선 정부가 조력자로서 지원하되, 정부만 할 수 있는 큰 틀의 장기정책 마련과 예산 확보 등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대협 안선미 팀장은 “지금껏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은 것에 대해 관련 단체들이 서운해하고 있다”며 “민간 차원에서 이끌어 온 일인 만큼 정부가 앞장서기보단 보조를 맞춰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창원 시민모임’ 이경희 대표는 “정부 안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담할 전문가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전문가를 키우거나 개방직으로 전문가를 영입해서라도 장기적이고 내실 있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며 “지금처럼 6개월~1년 만에 담당자가 바뀌어서는 정부가 국민 신뢰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동현·유재연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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