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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새 총리 집권 때 15년 뒤 비전 제시 의무화

지난해 10월 핀란드를 방문했던 정홍원 국무총리는 핀란드 국회의장으로부터 특이한 상임위원회 이야기를 듣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전문가에게 들어 본 국가미래전략기구 방향

 “여야 의원 26명이 미래위원회를 구성해 30년 뒤의 국가 미래를 매일 논의한다. 부채나 미래의 위험에 연관된 법안은 반드시 이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고 새 총리가 집권하면 이 위원회에 15년 뒤의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해 10월 24일 핀란드를 방문한 정홍원 국무총리(왼쪽에서 두번째)가 에에로 헤이날루오마 핀란드 국회의장(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국무총리실]
 정 총리는 귀국 후 “핀란드의 미래위원회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총리실에 핀란드 모델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다. 청와대도 지난해 6월부터 미래전략기구 구상에 착수했다. 유민봉 국정기획수석 주재로 국책연구원들을 모아 ‘미래융합네트워크’를 만들고 중장기 국가전략을 수립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네트워크는 지난달 8일 청와대에서 보고회를 열고 행정·입법·사법부와 학계·재계까지 포괄하는 공동체형 미래전략기구 모델을 제시했다. 새누리당도 미래기구 구상에 가세했다. 황우여 대표가 지난 4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선진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국회 안에 초당적인 국가미래전략기구를 신설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박근혜 정부에서 미래전략기구가 본격 가동되고 있지는 않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2월 출범 직후 이명박 정부가 만든 ‘미래기획위원회’를 해체했지만 이를 대체할 국가미래전략기구를 두진 않았다. 새누리당 역시 황 대표가 제안한 미래전략기구의 윤곽을 아직 제시하지 못한 상태다. 황 대표 측근들이나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은 “밑그림을 미리 마련하고 나온 제안이 아니다. 어떤 기구를 만들지 구상을 개시한 단계로만 알아 달라”고 설명하는 수준이다. 국회 내에 전략기구를 두자는 황 대표의 제안과 행정·입법·사법부를 포괄한 전략기구를 구상 중인 청와대의 입장이 어떻게 조율될지도 미지수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존속하면서 초당파적으로 국가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통령 5년 단임제로 인해 5년을 넘는 미래엔 손을 대지 못해 온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행정연구원 서용석 박사는 “현대 국가는 복잡성 때문에 정책을 시행하면 수 개월에서 10년까지 성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오히려 하향 곡선을 그리는 ‘다운슈팅(down shooting)’ 현상이 보편화돼 있다”며 “한국은 대통령 5년 단임제 때문에 정부의 미래시계는 최장 5년, 평균 2.5년에 불과하며 국회도 의원 임기인 4년을 넘어가는 미래엔 관심이 없어 다운슈팅에 대단히 취약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10~100년 뒤의 미래를 전망해 다운슈팅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기구 마련이 시급하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미국은 행정부에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전문기구인 국가정보위원회(NIC)를 두고 주기적으로 15년 뒤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1979년 국가 차원의 미래기구로는 처음 세워진 이 기구는 35년 넘게 존속하며 4년마다 대통령에게 글로벌 리포트를 제출해 왔다. 또 이스라엘·핀란드는 입법부에 각각 미래세대위원회와 미래위원회란 이름의 상임위원회를 두고 미래전략을 다루고 있다. 이 경우 대통령의 권한이 아무리 강력해도 기구가 영속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 국회도 16~18대(2001~2009년)에 ‘미래전략 특별위원회’가 설치됐었다. 하지만 법안·예산을 의결할 권한이 없어 정부에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요구할 힘이 없었다. 위원진도 자주 바뀌어 전문성이 약했다. 이 때문에 8년간 특위의 성과는 39차례 회의를 개최한 게 전부로 꼽힌다. 이에 따라 국회에 미래상임위를 둘 경우 법안·예산에 대한 심의·의결권을 부여해 힘을 실어주고, 위원회를 상대할 행정부처도 만들어야 한다고 중앙대 김동환(정책학) 교수는 지적했다.

 사법부가 미래전략에 참여하는 나라도 있다. 법원이 사건이나 제도 변화 추세를 미래와 연관시켜 연구한 끝에 조직을 혁신해 온 싱가포르가 대표적이다. 또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의 법적 권리’를 대법원이 인정한 필리핀도 사법부의 미래전략 관여가 돋보이는 경우다. 필리핀 변호사 안토니오 오포사(56)가 1990년 무차별 벌목으로 소멸 위기에 처한 필리핀 천연림을 보전하기 위해 어린이와 미래세대를 대표해 벌목업체들에 소송을 냈는데 대법원이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판결로 벌목업체 80곳의 허가가 취소됐고 천연림은 보전될 수 있었다.

 서용석 박사는 “선거로 뽑힌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들은 미래와 연관된 불확실한 현안을 법원으로 넘기려 하고 국민도 그런 문제를 법원이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며 “오포사 사건은 이런 추세를 보여준 좋은 사례이며 법원이 미래비전 제시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정부의 미래연구가 종전처럼 경제에만 초점을 맞춰 물질 중심의 성장주의에 매몰되면 안 되며, 앨빈 토플러식의 ‘대세’(메가트렌드) 예측식 접근법도 피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치권력과 자본 위주로 메가트렌드를 예측하면 대중이란 중요 변수가 배제돼 종합적인 미래전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미래연구는 반드시 2개 이상의 시나리오를 내놓아야 한다는 ‘복수의 원칙’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서용석 박사는 “네덜란드의 중장기 보고서는 반드시 2개 이상의 다른 시각을 담도록 정해져 있다. 정부가 단일한 미래전망을 내놓으면 그 미래상이 맞느냐 틀리느냐의 게임으로 변질되고 국민에게 이 비전을 따르라고 강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낙관적·비관적·중도적인 견해를 모두 제시하는 게 불투명한 미래를 전망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미래기구가 관료주의나 권력 측근들 간의 파워게임에 휘말려 제 기능을 못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도 중요 과제로 지목된다. 익명을 원한 한 미래학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 곽승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과 김상협 청와대 미래비전 비서관이 미래 보고서 제목을 놓고 이견을 보이는 바람에 연구진이 곤욕을 치렀다”고 전했다. 곽 위원장은 “미래를 전망하려면 30년 앞은 내다봐야 한다”며 보고서 제목을 ‘미래기획 2040: 더 큰 대한민국’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반면에 김 비서관은 “미래전망이 구체적이려면 10년 앞을 내다보는 게 적당하다”며 ‘2020’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학자는 “이명박 정부 실세였던 두 사람이 기싸움을 한 것”이라며 “결국 보고서 제목은 ‘2040’으로 하되 내용엔 ‘2020년 전망’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넘어갔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미래기구를 놓고 권력 내부 갈등은 얼마든지 재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용석 박사는 “국방부나 외교부, 경제부처는 정권이 바뀌어도 늘 존속하듯 미래전략기구 역시 미래전망을 명확히 제시하고 적절한 정책을 제안하는 근본 능력을 갖춘다면 정권교체나 권력 내부 갈등에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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