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다시 쓰는 고대사] 후대에 영웅 대접 연개소문, 당대엔 잔인한 권력자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국내성 서문. 장수왕이 수도를 옮길 때 연개소문에 이르러 고구려의 목숨이 끊어지게 될 것임을 짐작이라도 했을까. [사진 권태균]
668년 9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큰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군의 길잡이인 향도가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보장왕을 포로로 하는 공을 세웠다. 그 때문에 그해 12월 당 고종(高宗)이 보장왕 등에게 벼슬을 줄 때 남생은 향도(鄕導)한 공이 있다고 했다(『구당서』 199상, ‘고려’). 남생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정권쟁탈전에서 밀려 당나라에 몸을 의탁한 것이다.

<5> 연개소문의 두 얼굴

『삼국사기』 49, 『개소문(蓋蘇文)』편엔 연개소문의 삶과 정치에 대한 평가가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개소문의 성은 연(燕)씨다. 그는 스스로 물에서 났다고 하여 뭇 사람들을 미혹시켰는데,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동부 대인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뒤를 이어야 했으나 국인(國人)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그를 미워하였기에 뒤를 잇지 못했다. 개소문이 머리를 굽혀 절하고 사과하면서 관직을 이어받기를 청하고 만약 잘못이 생기면 비록 폐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마침내 지위를 이어받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흉악하고 잔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들이 (영류)왕과 비밀히 의논하여 개소문을 죽이려 하였는데, 일이 누설되었다. 개소문은 그의 부(동부)의 군사를 다 모아 사열하는 것처럼 하고, 아울러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준비하여 여러 대신을 함께 와서 보도록 했다. 초대된 손님들이 이르자 이들을 모두 죽였으니, 무릇 100여 명이나 되었다. 곧 달려가 궁궐로 들어가서 왕을 죽여 몸을 잘라 몇 동강을 내어 구렁에 버렸다. 그는 왕의 아우의 아들 장(臧)을 세워 왕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 원근을 호령하여 국사(國事)를 전제(專制)했다. 그는 매우 위엄이 있었으며 몸에는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고 좌우의 사람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매양 말을 타고 내릴 때에는 항상 귀인과 무장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밟고 오르내렸다.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반드시 대오를 정렬시키게 하고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서 구덩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고 숨어야 했으니, 국인이 심히 괴롭게 여겼다.”

낙양 근교에 있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석 앞·뒷면.
당 태종, 영류왕 사망 소식에 조문 사절
후대에 연개소문은 영웅이다. 그러나 당대 인식은 달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류왕과 대인들이 연개소문이 흉악하고 잔인하여 죽이려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5부 중 4부의 지배세력을 모두 죽였다. 나라를 이끌 인재 풀을 괴멸시켰다. 거기에 더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하여 나라의 운명을 재촉했다.

주목할 사실이 있다. 당 태종이 이세적(고구려 침공 총사령관)에게 “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성주는 재주와 용기가 있어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켜 복종하지 않아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능히 함락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대로 성을 주었다고 하오”라 한 말이다(『삼국사기』 21, 보장왕 4년). 같은 이야기가 『당서』220, ‘고려전’에도 나온다.

당 태종의 말만으론 연개소문이 언제 안시성을 공격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642년 10월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쥔 뒤부터 645년 8월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일 것이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후 안시성을 제압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성주에게 성을 그대로 장악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다른 성들은 어땠을까? 고구려의 모든 성들이 안시성과 같이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에 맞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지방의 성들을 완전 장악하지 못한 것도 분명하다.

당 태종은 영류왕 사망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자를 통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644년 고구려에 신라와 잘 지낼 것을 권하고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 고구려를 칠 것”이라 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책을 폈다. 이에 당 태종이 신하들에게 “대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연개소문)는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라 했다(『구당서』 199, ‘고려’).

당 태종은 많은 준비를 하고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645년 4월 이적(이세적)의 군대가 요하(遼河)를 건너 개모성을 함락하고, 5월 16일 당 태종과 합세해 요동성을 함락하고 요주로 삼았다. 5월 28일 백암성을 공략해 6월 항복을 받았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 북부 욕살(褥薩, 지방장관)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고구려와 말갈병(靺鞨兵)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나섰다. 기록엔 ‘연개소문이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은 안시성을 구원해주러 군대를 보냈다’고 했지만 실제론 당 태종의 야욕을 물리치려고 군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들 구원병은 패했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 태종에게 항복했다. 당 태종은 욕살 이하 3500명을 가려 당나라 군직(軍職)을 주어 내지(內地, 당나라)로 옮겼고, 말갈인 3300명은 구덩이를 파서 묻고, 나머지는 평양으로 돌려보냈다(『구당서』 199, ‘고려’).

우리가 아는 개소문, 역사 기록과 달라
8월에 군영을 옮겨 안시성을 공격했는데, 성민이 당 태종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며 저항을 했다. 이를 보고 당 태종이 노여워하자 이적이 “성을 함락하는 날 남자는 다 죽여 버리십시오” 했다(『구당서』 199, ‘고려’). 성안 사람들이 이를 알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안시성 전투를 여기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당 태종은 군량이 동나고 사졸들이 추위와 동상에 시달리게 되자 철군을 명했다. 당나라 군대가 성을 지날 때 성안에서는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누인 채 성주가 성 위에 올라 손을 모아 절을 하며 하직을 했다. 당 태종은 그들이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주고 임금을 섬기는 절개를 격려했다고 한다(『구당서』 199, ‘고려’). 무섭게 전투를 벌이던 안시성주와 당 태종이 서로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그때 안시성을 지킨 것은 보장왕이나 연개소문이 아니라, 안시성의 성주와 성민이었다.

연개소문이 전제하던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당나라에 강경 정책을 폈다. 649년 당 태종이 죽으며 고구려와의 전쟁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됐다. 연개소문의 고구려는 당나라와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다. 연개소문과 그 일족은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아갔다.

연개소문은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왕국 전체의 세력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국사를 전제하다가 666년 죽었다. 이후 668년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남건·남산 사이에 정권쟁탈전이 벌어졌다. 얼마나 숨가쁘게 망해가는지를 『삼국사기』 22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먼저 맏아들 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해 막리지가 됐다. 남생이 여러 성을 순시하러 나가자 두 동생이 왕명으로 불렀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안 남생은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자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국내성에 웅거하고 그 아들 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목숨을 구걸했다. 6월 남생은 당나라로 도망갔다. 8월 보장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 병마사를 맡도록 했다. 9월에 당 황제가 남생을 요동도독에 임명하고 평양도 안무대사를 겸하게 하고 현도군공을 봉했다. 12월에는 연정토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했다(『삼국사기』 6, 문무왕 6년). 667년 9월에 이적이 신성(新城)을 공격하자 성 사람들이 성주를 묶고 항복했다. 이적의 군대가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항복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고구려의 여러 성들이 당나라와 신라로 넘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668년 2월 이적·설인귀 등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빼앗았다. 그렇게 되자 부여천(夫餘川)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했다. 9월 21일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이적에 항복했다. 남건이 성문을 닫고 싸웠으나, 5일 만에 승려 신성(信誠)이 성문을 열어놓자 당군이 들어갔다. 남건은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고구려의 항복을 받은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덕남 및 대신 등 20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이로써 보장왕의 일족들과 연개소문의 아들들도 당나라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 『당서』 220, ‘고려전’에 “보장은 영순 초에 죽으니 위위경(衛尉卿, 임금을 호위하는 벼슬)을 추증하고, 힐리(頡利, 당에 포로가 된 동돌궐의 군장)의 묘 왼쪽에 장사 지내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고구려의) 옛 성(城)들은 왕왕 신라로 편입되었고,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달아났다. 이로써 고씨(高氏) 군장은 다 끊겼다”라 나온다. 역신(逆臣) 연개소문 일족이 고구려 왕실, 나아가 고구려인 자체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앞에서 그동안 은폐돼온 사료(史料)를 통해 연개소문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는 지난 100여 년 동안 만들어진 연개소문 상과는 다르다. 이제 642년에 만났던 두 사람, 즉 양신을 거느렸던 신라의 춘추(태종대왕)와 역신인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한국사에 남긴 역사의 발자취를 옳게 이야기할 때가 됐다. 신라의 춘추(태종대왕)가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연개소문과 그 일족이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아갔기에, 한국사의 무대가 패강(浿江, 청천강) 이남으로 위축됐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