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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당 유학승들이 신라에 차 소개 … 사찰 공양물로 자리 잡아

8세기 연기(緣起)법사의 발원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엔 부처님에게 바치는 여섯 가지 공양물의 하나로 차가 나온다. 사진은 경주 신선사에 있는 비석. 차를 바치는 모습이 나온다. [사진 박동춘]
신라 말 차 문화는 도당(渡唐) 경험이 있는 수행승들이 주도했다. 차를 잘 다루는 전문가이며, 차의 실질적 수요자였다. 이들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으로 차를 올렸다. 공양은 ‘존경과 숭배’를 뜻한다. 계문의 묶음인 『오분계본(五分戒本)』은 공양을 ‘봉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화엄경』은 의미를 확대해 ‘모든 것을 바치고, 회향하는 것’이라도 했다. 초기 교단의 공양은 의복이나 음식·탕약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점차 집이나 토지를 올리는 것으로 변했다. 이는 승단 경제의 토대가 된다.

<5> 불교와 차 문화

그럼 차는 어떻게 공양됐을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흔치 않지만 해석의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선종의 유입이 차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 볼 때, 한반도에서 처음 차가 공양된 사례는 『삼국유사』에서 확인된다.

“(정신 태자 보질도(寶叱徒)와 그의 아우 효명 태자) 두 태자는 나란히 예배하고 늘 이른 아침, 우통수(于洞水)를 길어다 차를 달여 (오대산) 일만 진신 문수보살께 차를 공양하였다.”(『삼국유사』 권3,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

우통수는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와 함께 한강의 발원지로 일컫는 그 우통수(于筒水)의 물이다. 처음으로 문수보살에게 차를 올렸던 인물인 보질도와 효명 태자는 늘 이른 아침, 이 물로 차를 달여 올렸다고 한다. 이들은 향기로운 차를 달이는 데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터득하고 있었다. 후일 초의선사(1786~1866)가 ‘물은 차의 몸’이라고 한 견해는 오래전부터 수행자의 이런 경험이 축적돼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신라 말부터 커지기 시작한 불교는 차가 널리 유포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승려들, 휴대용 다구 ‘앵통’ 지니고 다녀
보질도와 효명 태자는 왕자였음에도 성의와 존경·숭배라는 공양의 의미를 실천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차를 공양물로 사용했다. 그럼 두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연구자들은 정신 태자 보질도는 7세기 인물인 보천(寶川) 태자이며, 효명 태자는 천수 3년(692)에 즉위해 장안 2년(702)에 죽은 효소왕(孝昭王)으로 본다. 이를 근거로 차가 처음 공양물로 사용돼 부처님이나 문수보살에게 공양된 것은 7세기였음이 확인된다. 기록상으론 이게 처음이다.

실제 불전의 공양물이 구체적으로 열거된 사례는 8세기께 쓴 연기(緣起)법사의 발원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에 나온다. 발원문엔 육법공양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부처님께 올리는 여섯 가지 공양물, 향(香)·등(燈)·차(茶)·꽃·과일·쌀이다. 따라서 8세기께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이 규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양물은 이렇게 규격화됐지만 한편으론 공양의 원형도 지속된다. 충담선사가 미륵세존에게 올린 차 공양이 그 예다. 그가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했던 시기는 연기법사의 발원문 제작 때와 같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차 공양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내용이 『삼국유사』에서 확인된다.

“(경덕왕 24년(764년)) 3월 3일 (경덕)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에 납시어 좌우(신하)에게 이르기를 ‘누가 위엄 있는 스님을 모셔 올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낡은 헝겊을 기워 만든 옷)를 입고, 앵통(櫻筒·다구를 담는 통)을 지고 남쪽에서 왔다. 왕이 기뻐하면서 맞이했다. 왕이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하자 승려는 ‘충담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으니 승려가 ‘저는 늘 삼월 삼일과 구월 구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지금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나에게도 차를 한잔 줄 수 있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달여 올렸다. 차의 향과 맛이 특이했고, 찻잔에는 기이한 향기가 진동했다.”

3월 3일은 삼짇날, 9월 9일은 중구날이다. 경주 남산에 있었다는 삼화령의 미륵세존은 경주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 돼 있다. 충담이 차를 올린 현장은 원형을 잃었지만 이 기록은 8세기 차 문화의 유입 초기, 차의 유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특히 그의 앵통은 당시 차 도구의 형태와 수행승의 차 생활을 나타낸다. 그가 다구가 든 앵통을 지고 납의를 입었다는 것으로 보아 선종(禪宗)의 수행승(修行僧)이라 짐작된다.

당시 선종의 수행승은 새로운 문물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당으로 들어가 새로운 수행법을 익혔던 이들은 마조(馬祖·709~788)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를 원했다. 마조계의 선사상(禪思想)이 화엄과 상통하면서도 관념적인 허식을 부정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마조의 문하에 모여든 것은 신라 말, 불교계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마조의 선사상으로 현학적인 교학(敎學)을 부정하고 이를 뛰어넘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귀국한 수행승들 앞에 놓인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당시 득세하고 있던 교종은 선종 수행승의 활동 영역을 위축시켰다. 선종 수행승은 그러나 차를 마시는 전통과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일은 수행의 일과로 보고 빠뜨리지 않았다. 충담 스님은 이런 수행 풍토를 유지했던 승려로, 정해진 날에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일을 실천한 것이다.

그는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이 차를 청하자 곧바로 앵통에서 다구를 꺼내 차를 올렸다. 그가 올린 차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진동한 것으로 미루어 귀한 차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아울러 그가 지닌 앵통은 휴대용 다구인데 왜 휴대용 다구까지 갖고 다녔을까. 이는 선종 승단의 생활 규범을 의례화했던 ‘청규(淸規)’와 관련이 깊다. 당의 고승이었던 백장선사(720~814)가 만든 ‘청규’에 의하면 선종의 수행승들은 출타할 때 점차 차와 경전, 휴대용 불상을 꼭 갖고 다녀야 했다. 이는 차와 수행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충담이 앵통을 지녔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덕왕(742~765)도 차와 관련이 깊다. 충담선사나 월명 스님과 관련된 차 이야기도 경덕왕 때의 일이다. 어진 임금이었던 그가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는 해엔 오악(五嶽·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부악(父岳))의 산신(山神)들이 나타나 그를 모셨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완품 차 수입 탓 9세기께 신라서 첫 생산
이런 통치자였던 경덕왕이 3월 3일 귀정문 누각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 충담 같은 위엄을 갖춘 수행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또 충담에게 차를 청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차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충담은 자다법(煮茶法)으로 달인 차를 임금에게 올렸을 것이라 짐작된다. 당시 당에서도 유행했던 이 방법은 선승들에 의해 신라에 소개되었다.

자다법으로 차를 달이는 과정을 살펴보자. 당시 찻잎은 시루에 쪘다. 찐 찻잎을 절구에 넣고 찧은 다음 떡처럼 틀에 찍어 낸 후 은근한 불에 말린다. 이를 병차(餠茶·떡처럼 틀에 찍어 만든 차)라 부른다. 병차를 약한 불에 몇 차례 반복해 구운 후 가루로 만든다. 이 차 가루를 끓는 물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차 거품이 일어나는데, 이게 말발(沫餑)이다. 찻잔에 말발과 우려진 차를 함께 담아 마셨다. 말발은 차의 백미다. 당시 차는 귀품이었다. 수행승들이 완품의 차를 당에서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신라에서의 차 생산은 9세기께에나 이뤄진다. 특히 8세기 신라에서는 차를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하사품으로도 사용했다. 이는 『삼국유사』의 월명 스님과 도솔가에 얽힌 이야기에서 확인된다.

“경덕왕 19년(760)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인연이 있는 스님을 청해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치리라’ 했다. … 왕이 사자를 보내 월명 스님을 불러 제단을 열고 기도문을 지으라 했다. 월명이 아뢰길 ‘승려인 저는 다만 국선도(國仙徒)에 속해 향가만을 알 뿐이요, 범패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이미 인연 있는 스님으로 뽑혔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다’고 하였다. 이에 ‘도솔가’를 지어 바쳤다. … 곧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왕이 칭찬하고 차 한 상자와 수정으로 만든 108염주를 내렸다.”

월명은 승려이지만 국선의 무리였다. 국선은 사선(四仙) 중 하나다. 사선은 안상·영랑·술랑·남랑 등 네 명의 화랑을 말한다. 이들은 3000명의 낭도를 이끌고, 명승지를 유람하며 도의를 연마하고, 음악을 즐기며, 심신을 수련하면서 차를 즐겼다. 월명은 한민족 고유사상인 풍류도를 수련했던 국선이었다. 사선들이 산천을 유람하면서 차를 즐겼던 현장은 이곡(李穀·1298~1351)의 『동유기(東遊記)』에 ‘이 정자(한송정)도 사선이 노닐던 곳인데… 지금은 석조와 석지(石池), 두 개의 석정(石井)이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도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고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새로운 수행법을 받아들인 승려 가운데 풍류도를 함께 수련했던 수행자도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차는 수행승들의 수행음료, 공양의 대상물이었으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사품이었다. 그러다 고려 건국 뒤 선종의 교세가 확산되면서 차 문화는 화려한 꽃을 피운다.



박동춘 철학 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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