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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에 항모 건조 제안한 38세 함대 사령관 천샤오콴

해군부장 시절 장제스의 손위 동서인 콩샹시(孔尙熙·앞줄 왼쪽 둘째) 재정부장과 함께 독일을 방문한 천샤오콴(왼쪽 셋째, 해군 제복 차림). 1937년 4월 베를린. [사진 김명호]
청(淸)나라 말기, 중국에는 북양수사(北洋水師)와 남양수사(南洋水師·흔히들 강남수사라고 불렀다), 2개의 함대가 있었다(長江水師도 있었지만 보잘것없었다).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관할하던 북양수사는 톈진(天津)에 학당(學堂)을 설립해 인재를 공급받았다. 1890년, 서태후(西太后)는 남양수사도 난징(南京)에 학당을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61>

1894년 여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세계 8위를 자랑하던 북양수사는 일본 해군에 만신창이가 됐다. 숙식은 물론이고 생활용품에 용돈까지 지급하는 남양수사 학당으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남양수사 학당은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친척 중에 범죄자가 있거나 이상한 종교를 신봉하면 응시가 불가능했다. 중국인이라도 외국 국적을 취득한 적이 있으면 마찬가지였다. 청백리의 후예들에겐 가산점을 줬지만 응시자가 한 명도 없었다. 워낙 청백리가 귀한 나라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들어가면 재학 중 자퇴나 결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돈을 물어내면 자퇴는 허용했다. 교사는 영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졸업하기는 더 힘들었다. 이수해야 할 과목이 너무 많았고, 교육방법이 혹독했다. 2년간 영어로 기초지식을 쌓게 한 후, 4년간 천문(天文), 지리(地理), 해도(海圖), 포진(布陣), 어뢰(魚雷), 풍향(風向), 선박 수리와 제조, 포 사격 등을 반복시켰다. 1년에 한 차례 해양 실습도 실시했다.

국공내전 말기 천샤오콴은 타이완으로 가자는 장제스의 권유를 뿌리치고 대륙을 떠나지 않았다. 『마오쩌둥 선집』을 공부하는 천샤오콴. 1956년 2월 베이징.
고전 교육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좌전(左傳)』 『전국책(戰國策)』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암송해야 했다. 정궈판(曾國藩·증국번), 쭤종탕(左宗棠·좌종당), 리훙장과 함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해군제독 후린이(胡林翼·호림익)의 『독사병략(讀史兵略)』은 필수였다. 시험도 거의 매일 봤다. 학생들은 넌덜머리를 냈다.

외국인 교관들도 불평이 많았다. “아무리 미련해도 정도가 있다. 이렇게 교과목이 많고, 교육 기간이 긴 군사학교는 처음 본다. 해군 인재를 키우기는커녕 우수한 애들 정신병자 만들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남양수사를 총괄하던 양강총독(兩江總督) 류쿤이(劉坤一·유곤일)는 외국인 교관들이 그러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인재는 몇 년간의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100만 대군도 통솔은 한 사람이 한다. 재목감이 한두 명만 나오면 나머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머리 좋은 군인들이 많으면 나라가 편할 날이 없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만 가르치라고 했더니 말들이 많다. 우리 학당이 중국 해군의 요람 소리를 들으려면 우수한 지휘관 1명만 배출하면 된다.”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영국인 교관들은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반 이상이 학당을 떠났다.

시간이 갈수록 학생들도 꾀가 생겼다. 퇴학당할 때엔 돈을 물어내지 않아도 됐다. 틀린 답안을 써내고 체력장에서 일부러 낙오했다. 학교 측에서는 퇴학생들을 좋아했다. 이유가 있었다. 정부는 매년 120명에게 들어갈 돈을 내려보냈다. 감독관이 오면 아무나 데려다 교복 입혀서 숫자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학생 100여 명분을 횡령해 먹는 바람에 실제 졸업생이 20여 명 내외인 적도 있었다. 후일의 대문호 루쉰(魯迅·노신)도 동생과 함께 입학했다가 퇴학을 자청해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천샤오콴(陳紹寬·진소관)도 1907년, 열일곱 살 때 남양수사 학당에 입학했다. 해군부대 청소부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해만 지면 기숙사 불을 꺼버리자 학당 측에 요구했다. “내 방에 밤새도록 전등을 켜주기 바란다. 전기요금은 매달 주는 용돈에서 제하라.” 천샤오콴은 뭐든지 1등이었다.

최고 점수로 졸업한 천샤오콴은 북양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1915년 겨울, 혁명당들의 함정 탈취를 무산시켰다. 그 공으로 북양정부는 영국 유학을 보내줬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 해군과 함께 대독(對獨) 작전에 참여했다. 무슨 전공을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파리 강화회의에도 해군 대표로 참석했다.

천샤오콴은 파리 강화회의를 지켜보며 충격을 받았다. 귀국 직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서구 열강은 이익을 나눠먹기에 바빴다. 약소국을 기만하고 능멸했다. 중국은 비록 승전국이었지만 도마 위에 올려진 고깃덩어리였다. 이리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국제무대에서 살아 남으려면 스스로 강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부인이 고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 귀로 흘렸다. 1928년 제2 함대사령관에 임명된 천샤오콴은 전국을 통일한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2000만원만 주시면 항공모함을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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