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삶과 추억] 자메이카 출신 스튜어트 홀 별세

스튜어트 홀이 개방대학을 연구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문화연구를 더 대중적이고 접근 가능한 차원에서 하기 위함이었다. [사진 가디언 홈페이지]
‘문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 혹은 ‘사회적 삶에서 문화가 중요하다’는 말에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간에 이 사람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에 얼마간의 빚이 있다. 1970년대 문화 연구의 지평을 넓히며 ‘다문화주의의 대부’로 불려온 영향력 있는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10일 별세했다. 82세.



'대처리즘' 용어 만들어 신자유주의 비판한 문화연구 대가

 1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32년 서인도제도의 자메이카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홀은 51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했다. 한때 흑인해방 공동체 ‘카리브연방’의 건설을 꿈꾸기도 했지만 문화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홀은 60년 역사학자 E.P. 톰슨 및 문화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와 함께 신좌파를 대표하는 잡지 ‘신좌파 평론’(New Left Review)을 창간했다. 당시는 영국 마르크스주의에서 신좌파의 시대가 열리던 때였다. 신좌파는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주의적 흐름에 반기를 든 운동이다. 신좌파 평론에 참가한 이론가들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나 역사적 필연성의 법칙을 거부했다. 그 대신 이데올로기와 문화영역의 상대적 자율성과 중요성에 눈길을 돌렸다. 인간의 삶과 실천은 단순히 경제적으로만 규정되는 게 아니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는 영국 최초의 문화연구소인 버밍엄대 현대문화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인종과 성, 섹슈얼리티(sexuality), 정체성, 인종적 선입견과 미디어 등 다양한 주제로 문화 연구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 때까지 지식인 사이에서 ‘문화’로 여겨지지 않았던 영역을 새롭게 조명했다. 예술 중심의 심미적 ‘문화’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이 몸담아왔던 일상의 삶에 눈을 돌렸다.



 홀의 문화연구는 영향력이 컸던 만큼 비판도 많았다. 대중의 문화적 능력을 과대 평가한다는 지적이 있었고, 에릭 홉스봄은 문화연구가 ‘모든 게 문화’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또 다른 결정론이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79년 마거릿 대처 총리가 취임하기 몇 달 전에는 자신이 발간에 관여하던 이론 잡지 ‘마르크시즘 투데이’(Marxism Today)를 통해 ‘대처리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며 날선 비판을 날렸다. 그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바탕으로 신우파의 대처리즘과 대적한 최초의 좌파 분석가였다.



 홀은 79년부터 개방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를 계속했으며 97년 은퇴한 이후에는 대중 활동을 거의 접었다. 2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누군가가 아프다는 사실 때문에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당시 집권 보수당의 국가 의료서비스 개편정책을 비판했다. 신자유주의 역시,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또다른 경제결정론이었던 셈이다. 홀은 “내 인생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또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홀은 좌파, 특히 당시 노동당에도 회의적이었다. “좌파는 곤경에 빠졌다. 아이디어도, 자신에 대한 객관적 분석도, 따라서 비전도 없다. 그저 시류를 따라 오른쪽으로 간다. 좌파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교육시키지도,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정치적으로 바꾸는 데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



서경호 기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