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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대맛 라이벌] (2) 만두

자하손만두 직원들은 하루에 5000~6000개의 만두를 빚는다. 이곳에선 송편처럼 긴 반달모양이 특징인 서울식 만두 등 다양한 모양의 만두를 맛볼수 있다.


‘떡을 먹자면 송편, 소를 먹자면 만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두는 피가 얇고 소가 많이 들어야 맛있다는 의미로, 그만큼 소가 중요하다는 거겠죠. 어떤 재료가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 수십 가지 다양한 만두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다양한 만두 가운데 江南通新 독자가 뽑은 서울 최고의 만두집 두 곳을 소개합니다. 한 곳은 서울식, 또 다른 한 곳은 이북식 만두네요. 모양도 안에 들어가는 소 재료도 다르지만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직접 빚은 속이 꽉 찬 만두라는 건 똑같습니다.

1위 자하손만두, 2위 개성집





1위 부암동 자하손만두

직접 담근 조선 간장으로 손맛 낸 서울식 만둣국




자하문터널에서 팔각정 쪽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된장·간장이 담긴 항아리가 옹기종기 놓여있는 가정집이 있다. 언뜻 보면 식당같지 않지만 20년 넘게 만두를 팔아온 서울식 만두 전문점인 자하손만두다. 부암동 토박이 박혜경(60) 사장이 운영한다.



 “처음엔 올케랑 재미 삼아 시작했어요. 이 집이 우리 친정집이었거든요. 근처가 다 조용한 주택가였는데 1993년 인왕산 개방으로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어요.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군사시설이 많다는 이유로 폐쇄돼 있었거든요. 그걸 개방하니 인왕산 보겠다고 사람들이 몰려든거죠. 마침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터라 갓 결혼한 올케에게 ‘우리 만두 한 번 팔아볼까’라고 제안했죠.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만두 빚을 때면 빨리 예쁘게 잘 만든다고 항상 칭찬을 받아서 만두라면 자신 있었거든요.”



 그렇게 집 앞 마당에 파라솔 3개 펴고 장사를 시작했다. 박 사장과 올케는 만두를 빚고 친할머니는 빈대떡을 부쳤다. 남동생은 친구를 데려와 서빙을 했다. 간판도 없어 그냥 종이에 ‘손만두’라고 써서 문에 붙인 게 다였다.



 맨 처음 선보인 메뉴는 어릴 때 배운 그야말로 정통 서울식 만두였다. 이북식 만두가 동그란 모양이라면 서울식 만두는 송편같은 긴 반달 모양이다. 만드는 방법도 다르다.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밀지 않고 송편처럼 손으로 피를 삿갓 모양을 만들어 소를 넣고 닫는다. 만두 양 끝을 완전히 닫지 않는 것도 서울식 만두 특징이다.



 박 사장은 “할머니가 ‘양 귀를 열어두면 국물이 만두 속과 바깥을 왔다갔다 해서 만두와 국물 모두 맛있다’고 가르쳐줬다”며 “배운대로 했는데 손님들이 터진 만두라고 생각하기도 한 데다 미리 냉동시켜야 할 때 불편해서 지금은 그렇게 안 만든다”고 말했다.



 소 재료도 발전했다. 두부·고기·김치·숙주 등이 들어가는 기본 만두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봄에는 제철식재료인 엄나무순을 넣은 ‘엄나무순 만두’를, 여름에는 오이를 쪄서 식힌 후 차가운 양지국물에 넣어 먹는 ‘편수찬국’을 내놓는다. 또 채식주의자를 위해 두부와 버섯·숙주 등만 들어간 깔끔한 맛의 ‘소만두’도 개발했다.



 처음엔 소박하게 시작했지만 박 사장 손맛이 입소문이 타면서 테이블이 점점 늘어났다. 앞마당 파라솔이 모자라 집 위쪽 마당까지 파라솔을 더 폈고, 조금 지나자 집 마루에도 상 2개를 더 들여놓았다. 얼마쯤 더 지나자 마루 옆 큰 방에도 손님을 들여야 했다.



 “원래 그 방에서 부모님이 지내셨는데 할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겨가셨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손님이 늘면서 식당 규모도 커졌어요.”



 입소문으로 유명 맛집이 되자 백화점에서도 연락해 왔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2006년 리뉴얼 오픈을 하면서 식당가를 만들었는데, 그 안에 입점해 달라는 제안이 왔다. 음식 맛을 인정받았다는 뿌듯함에 기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를 받았다.



 “처음엔 정말 기고만장했어요. 이 외진 곳에서 광고 한 번 안 했는데 사회 저명인사가 찾는 음식점으로 번창하니까 자신감이 넘쳤어요. ‘내가 꽤 잘 하나보다’라는 생각도 했죠. 그런데 막상 백화점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계속 매출 꼴찌인 거예요. 이제 8년 정도 됐는데 최근까지 그랬어요. 자존심이 확 상했죠.”



 하지만 박 사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손님이 없는 이유를 찾았다. 그러다 똑같은 음식도 백화점에서 먹을 땐 달라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 사람에게 만두는 늘 먹는 음식이 아닌 별식이다. 설렁탕이나 비빔밥에 비해 선호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부암동 손님은 어쩌다 그 별식을 먹으러 일부러 찾아오지만 백화점 손님은 여러 종류의 음식을 고를 수 있으니 굳이 만두를 먹을 필요가 없는 거다. 그래서 고심 끝에 새 메뉴를 개발했다. 굴림만두(만두피 없이 소만 동그랗게 만들어 밀가루를 입힌 만두)를 육개장 같은 매콤한 국물에 넣어 밥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자하뚝배기’다. 박 사장 전략은 성공했다. 자하뚝배기는 백화점 인기메뉴로 자리 잡았고 매출 꼴찌에서도 탈출했다.



 자하손만두 맛의 비결은 딱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분명 직접 담그는 조선간장이다.



 “예부터 장은 그 집만의 고유한 맛을 정했어요. 어느 집에서나 다 만들었기 때문에 가장 귀한 조미료이자 그 집 모든 음식의 기본이 되는 거죠. 요즘엔 일반 가정집은 물론 음식점도 장을 사서 먹지만 난 그게 기본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직 직접 담그는 거죠. 또 어릴 때부터 입맛이 단련되서 이런 간장 넣은 국물맛을 알아요. 간장은 단순히 짠맛만 내는 게 아니라 고유의 맛이 있어요. 얕고 부드러운 맛, 입안을 감싸면서 둥그런 맛이 나지요. 와인도 종류에 따라 둥그런 맛, 날카로운 맛이 있다고 하잖아요. 간장도 그래요.”



 간장은 대표적인 슬로우푸드다. 손이 이만저만 가는 게 아니다. 잘 띄워 말린 메주를 소금물에 40~50일 숙성시킨 뒤 메주를 건져내고 그 물을 끓인다. 그리곤 불순물을 잘 걸러 항아리에 담아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국에 넣는 맑은 간장이 되기까지 보통 6개월쯤 걸린다.



 “모든 음식이 다 어렵고 힘들지만 만두는 정말 예민한 음식이에요. 국물도 잘 내야 하고 만두도 따로 빚으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죠. 지금도 직원 5~6명이 하루종일 5000~6000개의 만두를 빚어요. 힘들지만 그럴수록 ‘나만의 음식’이 되는 게 바로 만두에요.”



(1) 개성집에선 만두피를 소주병으로 일일이 밀어 만든다. (2) 동그란모양의 개성식 만두 (3) 빚은 만두는 소쿠리에 담아 냉동보관한다. (4) 개성집 주인 이유순 할머니


2위 목동 개성집

황해도 할머니가 27년째 빚는 개성식 만두




5일 오후 2시 목동의 개성집. 점심 장사를 끝내고 직원들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고 있었다.



 2명은 소주병을 이용해 만두피를 밀고 다른 2명은 호박과 고기가 듬뿍 든 소를 넣어 순식간에 만두를 만들었다. 손만두를 파는 집이라도 만두피는 대부분 기계로 뽑는데, 이곳에선 이렇게 사람이 직접 밀어서 만든 피만 쓴다.



 “기계로 하면 더 빠를 것 같지만 손으로 하는 게 더 빨라. 반죽을 아주 약간 질게 해서 두어 번 밀면 쭉쭉 펴지는데 뭐 하려고 기계를 써. 그리고 틀로 찍어낸 나머지 찌꺼기 반죽을 다시 뭉쳐서 사용하면 밀가루가 딱딱해져서 못써.”



 만두피 미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말을 건네자 식당 한 쪽에 앉아 잠시 쉬고 있던 주인 이유순(81) 할머니가 말했다. 지난 여름까지도 직원들과 함께 만두를 빚었지만 요즘 허리가 좋지 않아 아주 바쁠 때만 만두를 만든다.



 이 할머니의 만두는 외할머니에게 어릴 적에 배운 방식 그대로다. 이 할머니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이지만 어릴 적 개성 외갓집을 자주 왕래하며 외할머니한테 개성 만두 만드는 걸 배웠다고 한다. 당시엔 지금처럼 재료가 다양하지 않아 두부를 조금 넣고 주로 호박을 넣어 만두를 만들었다. 고기는 귀해 특별한 날에만 아주 조금 넣었을 뿐이다. 지금은 호박은 물론이고 돼지고기 목살과 볼기살(돼지 뒷다리 넓적다리 안쪽 부위)·표고버섯 등을 가득 넣어 씹는 식감이 강하다.



 이 할머니가 서울에 온 건 해방 즈음이다.



 “내가 12살 때 해방이 됐어. 그 즈음 부모님이랑 외조부·외조모랑 같이 서울에 왔지.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난다, 서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말들이 많았어. 그래서 다시 평산으로 갔다가 해방 후 다시 서울로 왔지. 어휴~ 말도 마. 내 나이 사람들은 참 고생 많이 했어. 6·25사변 나고 1·4후퇴 겪었는데 다시 4·19다 뭐다. 아이고~ 편한 날이 없었어.”



 이 할머니의 인생살이는 그 자체로 한국의 불행한 현대사였다. 한국전쟁으로 온 가족이 고향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1년 1·4 후퇴 때 미처 서울로 내려오지 못한 아버지와 생이별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랬듯 이 할머니네 집 역시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김장철 새우젓 장사와 배추장사 등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의 집 식모살이까지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한 건 자식 낳은 후 혼자된 30대 후반이었다.



 “내가 어디 돈이 많나. 식모살이 해서 조금 모은 돈으로 리어커 하나 사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어. 당시 정동에 있던 MBC 건물 앞에서 했지. 뭐 어디 진열할 데도 없고 하니까 제철과일 딱 한 종류씩만 팔았어. 여름에 복숭아 팔고, 그게 지나면 포도, 또 그게 지나면 사과, 또 귤 이런 식이지. 그런데 그때 노점상 단속을 많이 해서 광화문 앞을 리어커 끌고 지나가면 순경들이 막 잡아가. 그럼 별수 없이 종로경찰서 가서 하룻밤 잔 뒤 벌금 내고 나왔지. 한두 번이 아니어서 나중엔 질리더라고. 그래도 애들이랑 먹고살아야 하니 노점상을 이렇게 한 4년 했어.”



 이 할머니가 목동으로 터를 옮긴 건 목동 일대에 아파트가 막 지어지기 시작한 1985년이다. 은평구 역천동에서 빈대떡을 팔던 이 할머니에게 누군가 목동에 아파트가 생기니 거기서 장사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귀띔해줬다. 아파트 공사장 인부를 상대로 800원짜리 백반을 팔았다. 이렇게 2년 번 돈으로 지금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87년 ‘보쌈집’이란 간판을 내걸고 만두와 보쌈·빈대떡을 팔기 시작했다. 지금 개성집의 시초인 셈이다. 작지만 번듯한 지금 가게를 갖게 될 때까지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만큼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다고 한다.



 “리어커로 과일장사 할 때 만났던 MBC 직원이 있어. PD 했던 양반인데 지금도 가끔 들러서 만두 먹고 가. 그리고 여기 87년에 목동 아파트 처음 입주할 때 자주 왔던 손님의 아들이 장성해서 지금도 자주 오고. 그 아들이 잘 큰 거 보면 내가 다 뿌듯해. 개성집이란 이름도 보쌈집에서 이리로 옮길 때 손님들이 추천해준 이름이야.”



 이 할머니가 정(情)이 넘치는 사람이라서일까. 이집 단골들은 진짜 자기 할머니, 어머니집에 온 것처럼 가게 문을 들어서며 스스럼없이 인사를 한다. 직원들이 바빠 보이면 손님이 직접 음식을 주방에서 받아 자리로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손님 때문에 이 할머니는 하루도 가게 문을 닫을 수 없다고 한다. 미국에 사는 막내아들이 결혼할 때도 가게문을 일주일 이상 닫는 게 싫어 참석하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고생고생해서 이뤄놓은 가게고 내 음식 먹으러 찾아오는 좋은 손님이 있는데 그렇게 오래 문을 닫을 수가 없더라”며 “아들이 잘살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지금도 새벽 5시면 일어나 가게로 나온다. 시장에서 배달되는 채소를 받고 장사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다른 식당과 달리 손님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물을 대접하기 위해 결명자차도 끓인다.



 “처음엔 좋은 사골을 푹 끓여서 국물을 했는데 만두소에도 고기가 많으니까 손님들이 느끼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그냥 멸치로 국물을 내. 그래도 두툼한 피에 호박이랑 고기가 가득 든 만두 먹으면 속이 든든할 거야. 한그릇 먹고 가.”







글=심영주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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