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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우리는 앞에서 옛 「김일성 장군」에 관한 전설 중 단천 출신설과 일본육사 출신설을 길잡이로 하여 그 실존 여부를 추적했던 바 단천 출신으로는 의병장 김일성 장군이 있었고 일본육사 출신으로는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진 김광서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본명이 김창희인 김일성 장군은 1888년 또는 1889년 생이므로 올해 85세쯤 되어 그는 일본육사 출신이 아니다. 그리고 김광서인 김일성 장군은 1887년 생이므로 올해 87세가 되며 그는 북청 출신이지 단천 출신이 아니다.
<김창희·김광서는 실존>
그러니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공통점은 무장항일 투쟁을 했다는 것과 정치적 단체에 관계하지 않았다는 것(그들의 부대에조차 특별한 명칭을 붙이지 않아서 그저 김일성 부대 또는 독립군으로만 통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전혀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같이 전설의 주인공답게 사망연도가 확실치 않다.
이들의 활동무대 또한 한만국경과 노만국경 즉 국경지대였다. 활동시기도 중첩된다.
이상과 같은 유사점이 있는데다가 그들의 이름자는 「김일성」 「김일성」으로 음이 같다. 그래서 이들은 한사람의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져 왔고 따라서 「김일성 장군」이라 하면 혹은 의병 때부터의 투사라느니, 3·1 운동 때부터라느니 하는 전설이 생겼고 동시에 혹은 단천 출신이라느니, 아니 일본육사 출신이라느니 하는 전설이 얽혀왔던 것이다.
전설은 전설을 낳는 법이고 또 거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요소가 따르게 마련이라서 「김일성 장군」의 정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왔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제 「김일성 장군」의 전설이 전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하여 옛 「김일성 장군」은 가공의 인물이 아니었다. 분명히 실존했던 이상 두 사람의 항일투사가 「김일성 장군」이란 하나의 이름 속에 상징되어 왔던 것이다.
일제와 싸운 애국투사는 수없이 많았다. 기록에 남은 사람은 그 전체의 극히 제한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김일성 장군이 활동해 시작한 1907, 8년의 의병 때만 하더라도 남은 제주도로부터 북은 간도·연해주에 이르기까지 의병항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각양각색의 성분의 의병장들이 적기로는 10여명에서부터 혹은 30명 혹은 70∼80명, 많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5백∼6백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싸웠던 것이다.
이때에 부자가 각기 의병장으로 일제와 수차에 걸쳐 격전을 벌인 끝에 불행히도 붙잡혀서 사형까지 당했어도 끝내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일조차 있었으니 전남 광산군의 양진여·양상기 두 부자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들의 투쟁기록은 해방 후 그 자손이 10년 동안 국내 각 법원의 문서창고를 뒤지다가 끝내 그 판결문을 찾아냄으로써 사형된 지 61년만인 1971년6월에 겨우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김광서가 활동하던 3·1운동 후의 항일무장 투쟁시기에 있어서는 그의 투쟁실적을 잘 알만한 사람이 몇 사람 해방되어 조국에 개선했고 또 자기의 항일투쟁사도 써서 펴냈으니 의당 동지이자 선배였던 김광서에 관해서도 사실을 밝혀 기록을 남길만도 했는데 웬일인지 언급이 없다. 고작 언급했다면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단역으로 김광서를 잠시 등장시킨 점도다.
이러한 항일지사들의 자기중심적인 사고 때문에 해외의 독립운동 전선이 사분오열·이합집산을 불면도 했거니와 살아남아서 귀국해서는 더욱 자기의 공을 앞세우다보니 결국은 후세로 하여금 역사의 진실에 접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것이 여간 한스럽지 않다.
<김광서는 비 공산주의자>
김광서의 항일투쟁은 그가 적군과 연합하여 일군 및 백군과 싸웠던 사실 때문에 다른 항일투사들에 의해 오해를 받은 흔적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말하여 김광서를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사람으로 간주했던 것이 아닌가싶다. 그래서 해방 후 귀국해서 특히 공산당과의 대결이 첨예해지자 의식적으로 김광서에 관해 거론을 회피했던 것 같고 또 그가 김일성 장군이었음을 말하기 꺼려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전회에서 밝혔듯이 김광서는 끝내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만 싸웠던 사람이다.
어쨌든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 여러 사람의 청년 공산주의자들이 「김일성」이란 이름을 즐겨 썼던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1925년 서울의 고려 공산청년회가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보냈던 김천 출신의 김종수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고 1927년께 북만의 아성지구에 고려 공산청년회원으로 「김일성」이 있었으며 이 사람은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고 타살된 자(8회 참조)일 것이고 또 1927년께 만주 연길현의 말단 공산주의 조직에는 「김일성」이란 자가 있었고 1928년의 제4차 조선 공산당 북경지부에 「김일성」이, 그리고 1930년 5·30 간도 폭동 때엔 「김일성」이란 청년이 있었다(8회 참조). 이 「김일성」은 제6사장 김일성이 죽은 다음 그 대를 이어 재2방면군장이 되었다가(44회 참조) 소련에 가서 죽은 자(46회 참조)이다.
그런데 김광서의 김일성과 바로 똑같은 이름자를 썼던 사람은 제6사장 김일성이었다(28회 및 34∼39회 참조). 항일과 공산혁명은 구실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직업적인 비적 떼에 불과했던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장 김일성은 무엇 때문에 하필이면 이 유래 있는 이름을 썼던 것인가. 김광서는 노령에 가서 독립군을 지휘하면서부터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고 1920년부터 22년 가을까지 독립군의 활약이 가장 컸었다.
제6사장 김일성은 1920년에 노령으로 들어갔다가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갔다. 연해주 방면의 한인청년들이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다니기로는 21년 말 또는 22년 초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보낸 일단의 사람들과 또 22년 가을에 「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이 보낸 30명 가량의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제6사장 김일성도 이들 어느 쪽에 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모스크바」로 가기 전에 김광서의 김일성 부대에서 대원으로 있었던가, 아니더라도 그 활약상을 익히 들을 수가 있었다.
22년 가을에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들어간 30여명중 한사람이었던 이지택씨(75·진주거주)는 그 자신도 그랬지만 당시 연해주 지방 우리 청년들은 서북간도 출신도 많았는데 대개가 독립군으로 적군과 연합하여 일군과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에 「모스크바」로 공부하러 갔었다고 증언했다. 제6사장 김일성은 노령 항일투쟁의 맹장 김광서의 김일성 부대에 있었던 것을 연분으로 해서 그가 공산대학을 마치고 만주 사변 후에 중공당의 동북항일연군으로 파견되어 왔을 때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죽었으므로 확인할 도리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로에 배반당하고 배척을 받으면서도 끝내 민주주의 독립노선을 지켰던 김광서의 항일투쟁의 상징적 이름인 「김일성」을 적로의 앞잡이 중공당의 1개 공비대장이었던 제6사장이 이어 썼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겠다.
<역사은폐·개서엔 실패>
제6사장 김일성은 죽었고(38, 39회 참조) 대를 이어 승명했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도 죽었다(46회 참조). 실제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던 사람들은 다 죽고 북한의 김성주가 해방 후부터 그들 이름과 그 경력들을 변조해서 자기 것으로 하고 있다. 너무도 기막힌 역사에 대한 모독이요, 민중에 대한 우롱이다. 그래서 그는 1946년 3·1절 기념식 전에서 이성렬 등에 의해 폭살 당할 뻔도 했다. 김성주는 자기가 제6사장 김일성으로 보천보를 습격했던 사람인양 꾸미기 위해 세밀한 공작을 했었다.
1947년 가을 평양의 철도재판소에다 제6사장 김일성의 부하였던 박달의 처를 불잡아다 놓고 왜경에 붙어 박달을 체포케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하면서 대학생들에게 참관을 시키기도 했고 또 진천보 습격 때 약탈한 짐을 운반해줬던 그 지방 사람들을 평양에 불러다가 상금을 나누어주는 연극도 했다. 아무리 철저히 위장을 해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김성주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강화하는 「테러리즘」에는 성공하고 있으나 역사를 은폐, 개서하려는 「테러리즘」에 있어서는 이미 실패했다, 이것으로써 그의 권력도 실패할 것이다. <끝>
<필자의 인사말>
5개월 여에 걸쳐 이 글이 연재되는 동안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많은 독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1974년9월3일 [제자=김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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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