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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제7장 해방과 제3의 김일성|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제자=김홍일>

1945년8월8일을 기해 일본에 선전 포고한 소련은 중국과 한국에 대한 확고 부동한 장기 계획을 빈틈없이 세우고「김일성」조작음모를 은밀히 진행했다.
「김일성」을 조작해 내는 음모가 필요했던 사정은 이렇다.
당시 소련의 정책은 모든 점령지역에 공산정권을 세우고 그 정권을 철저히 괴뢰화 하자는 것이었다. 점령지역에 이미 소련이 인정할 만한 공산당이 있는 경우 외엔 소련에서 훈련시켜 데리고 간 사람 중에서 내세웠다.
그런데 내세울 사람을 정하는데 있어선 투쟁경력과 그에 따르는 저명도가 다소간은 있어야 했다.
한인에게 알려진 지명도란 점에선 단언「김일성」이란 이름이 위였다.
<김일성의 사망 감추려 부심>
비록「공비 김일성 부대」로 보도는 되었어도 그 이름은 1936년부터 1940년까지 국내신문에 자주 오르내린 때문이다. 특히 그 이름 제6사장「김일성」은 1937년6월4일 밤의 보천보 습격으로 더 유명해졌고 그가 그해 11월에 죽자 소련은 죽지 않은 듯 위장하기 위해 승명까지 해 대를 잇게 했던 것이다.
이 대를 이은 제2방면군장「김일성」의 이름은 또 야부 토벌대가 현상금까지 붙여 토벌을 설쳤던 관계로 더욱 유명해 졌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할 때 장교 계급장을 붙여 데려온 일단의 한인 30여명 속에는 이미 김일성이란 사람은 없었다. 다시 말해 1940년에 입소, 43년께까지「오케안스카야」야영학교의 책임자로 있던 2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이 일단에 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는 43년∼45년 사이에 소련에서 죽은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딴사람을「김일성」으로 행세하도록 꾸며야 했다. 그 자리에「간택」된 자가 바로 김성주다.
김성주가「김일성」에 간택된데는 첫째로 그가 소련의 절대적 괴뢰화 정책에 알맞은 인물이란 충분한 평가가 전제된 외에 공교롭게도 김성주에게는 밀고 나가면 그런 대로 그럴듯하게 꾸며댈 수 있는 꼬투리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소련군은 한국 민중 속에 옛「김일성 장군」에 대한 동경과 만주의 공산 유격대의「김일성」이름이 널리 퍼져 있으나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평남 대동군 고평면 일대에는 남리의 김보현 영감의 손자(김성주)가「김일성」이라 하는 소문이 꽤 퍼져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소문은 있던 일인데 사연은 이러하다.
<김일성을 자칭한 꼬투리>
1939년 가을부터 야부토벌대가 양정우·김일성(2대) 등등에 현상금을 걸고 대섬멸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을 때 동변도의 한인들 정보망에 처음으로 김성주가「김일성」이다 하는 소문이 들어온 일이 있었다.
간도성 차장 유형순(수년 전에 가평에서 죽었다)의 지시로 안도의 조선인회장 이도일씨(3회 증언자)가 평양까지 가서 평남도경을 시켜 김성주의 조모를 만주로 데려다『성주야, 나왔다』하고 귀순공작을 폈던 일이 있었다. 산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대로 만주의 일부 한인들 사이와 고평면 일대에 김성주가「김일성」인줄 아는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김성주가「김일성」으로 오인된 사연은 무엇일까. 김일성 부대는 대원들을 10여명씩으로 나누어 각지에서 소부대 활동을 하게 하고 각기 김일성 부대라 칭하게 했다.
따라서 소부대의 대장은 각기 김일성으로 통했다. 김성주도 1939년에 산중에서 김정숙과 부부가 된 점으로 보아 10여명의 소부대 대장쯤은 두었을 것이다(중간 간부 이상이 아니면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성주도「김일성」을 자칭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또 그는 소년 시절부터 우쭐하는 성격이 있었으므로 소부대장으로서의 자칭「김일성」을 과시했을 것이다. 아니더라도 김성주가 오가자에 있을 때(9회 참조) 얻은 별명인 김일성이란 이름을 계속 썼다면 거기서 혼동이 생길 수도 있었겠다. 그래서 김성주가「김일성」이다 하는 뜬소문이 생겼던 것으로 분석된다.
<귀국 후 한때 김영환으로>
「김일성」이란 사람이 여럿이란 정보(44회 참조)는 관동군에도 입수됐던 일이다. 그러나 당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김성주가 아니라 용정에서 대성중학을 다니다가 소련에서 사관학교를 나왔던 안경 낀 김일성(43, 44회 참조)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성주 일단이 소군을 따라 북한에 들어온 것은 8월 하순으로 보여진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로 원산을 거쳐 평양에 들어온 듯해 김성주는 귀국 직후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으로 행세했다.
당시 북한에는 이름 있는 공산주의자로 현준혁 김용범 박정애 장시우 오기섭 정달헌 이주하 주영하 이주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소련과 선을 유지해 오지는 못했으나 그런 대로 출신지방에선 영향력이 상당히 있었다.
이중 소군의「로마넨코」사령부와 제일 처음 선이 닿은 측이 김용범 박정애 부부. 김과 박은 모두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국내에 잠입했다가 체포됐던 사람으로 출옥 후 야합한 처지였다.
김성주 국내에 들어와 행한 첫 과업은 협조하지 않는 국내 공산주의자의 제지.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평남지구책을 맡고있던 현준혁은 자기 나름의 이론이 서있어 만만치 않았다.
현은 45년9월28일 대낮 평양시청 앞 대로에서 장시우가 지휘하는 무장 적위 대원에게 암살 당했다.
「로마넨코」사령부에서 며칠전 김영 김성주 김용범 등과 모의한 각본 대로였다.
물론 범인에 대한 수사는 착수조차 되지 않았다. 이러한 무자비한 폭력으로 국내파의 항거를 막았다.
<조작 위해 언행일치 다짐>
「로마넨코」사령부는 소련파 내부의 양해를 명령, 언행일치를 다짐받고 10월14일 김성주를「김일성」으로 선포하는「김일성 장군 환영군중대회」였었다.
그러나 33세의 새파란 김성주를「김일성 장군」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발이 성성해야 할 노장군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민중들은 김성주가 노「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점에서만 가짜라고 생각했지 만주의 공산유격대의 제6사장 김일성 또는 그 대를 이은 제2방면군장 김일성도 아닌 가짜란 사실까지는 아마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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