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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음식잡설] 해장면·여행면·학생면 … 진화하는 즉석면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술 권하는 사회이니 해장하는 법도 다양한 나라가 한국이다. 해장국 같은 전통적인 음식은 물론이고 이색 취향도 많다. 피자에 버터를 발라 먹는 사람도 봤고, 오이 주스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도 있다. 면도 다양한데, 꼭 짜장면 곱빼기를 먹어야 해장이 된다는 친구도 있다. 다른 친구는 반드시 육개장맛 즉석면만 해장이 된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에 술을 배웠는데, 그때 마침 그 면이 출시되어 속 쓰린 아침을 달래주었던 버릇이 30년을 이어가고 있다.

냄비에 끓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즉석면이 나와서 화제를 모은 것이 72년이다. “물만 부어서 3분에 오케이”라는 헤드 카피는 충격이었다. 물만 부어도 면을 먹을 수 있다니! 요즘으로 치면 일류 레스토랑에서 유행한다는 ‘분자(分子)요리’에 버금가게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제일 잘나가던 삼양라면이 인기 모델을 써 광고료가 제일 비싼 신문 1면에 크게 광고를 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시 라면업계에서도 미래의 한국인이 이렇게 즉석면을 많이 먹을지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식도락가로 유명했던 언론인 고 홍승면 선생이 ‘여행면(旅行麵)’이라는 게 중국에는 60년대 초반에 있었다고 한 걸 보면 즉석면의 역사는 제법 되는 셈이다. 선생의 묘사에 의하면 여행면은 물만 부어도 먹을 수 있는 국수로 여행자가 들고 다니는 식품이다.

원래 국수가 중국에서 태동할 때 실크로드를 이동하는 대상(隊商)에게 인기를 끌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여행면은 아주 오래된 역사라고도 하겠다. 현대에 실크로드를 걸어서 횡단한 프랑스 언론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주로 국수로 허기를 달랬다고 책에 쓰고 있다.

요즘 우리는 여행 갈 때 다른 건 몰라도 컵라면 몇 개는 주섬주섬 챙긴다. 홍 선생이 말한 여행면이 지금 시대와 딱 맞아떨어진 셈이다. 국적 불문하고 한국에 취항하는 비행기는 대부분 이 라면을 준다. 진짜 여행면이다. 물론 요새는 함부로 덜 익었네 어쩌네 하는 사람은 볼 수 없다. 고도와 기압의 차이에 따른 라면 면발의 익힘에 대해 기내에서 불평하면 안 된다는 걸 학습한 까닭이다.

그 사건을 외국에서는 매우 특이하게 생각했다는 후문이다. 대기업 중역도 찾아 먹는 ‘컵라면’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캐비아와 푸아그라가 실리는 비행기 최고급 좌석에 원가 1달러 미만의 즉석음식이 당당히 올라 있는 한국적 상황도 매우 이례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라면에서는 빈부격차와 계층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위안도 해볼 수 있을 듯하다.

요즘 즉석면은 사회적으로 다르게 쓰인다. 여행면이 아니라 학생면이 되고 있다. 늦은 밤, 귀가할 때 편의점 앞에서 오들오들 떨며 라면발을 삼키고 있는 학생들을 보게 된다. 저들은 입맛에 맞아서 먹는 표정이지만 보는 어른들은 안쓰럽다. 단무지 쪽 하나 없이 뜨거운 면을 후룩후룩 들이켠다. 학원 끝난 심야시간에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하기에 이처럼 고마운 음식도 드물다. 단돈 1000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뜨거운 국물을 마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기왕지사 먹는 즉석면이라면 아이들이 좀 더 따뜻하고 안락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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