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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설 기어 오른 성인봉, 하산길은 스키로 쌩~

나리분지는 산 중턱에 거짓말처럼 펼쳐진 평원지대다. 나리분지는 울릉도 안에서도 적설량이 가장 많다.

설국 울릉도를 찾았다. 1월에만 150㎝ 이상 눈이 내린 섬은 온 천지가 새하얀 무릉도원이었다. 궁극의 설경을 맛보고자 성인봉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산 타는 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성인봉 설산 등반. 높이는 986m로 높지 않지만 눈길을 헤쳐가며, 뒹굴고 미끄러지는 재미가 남달랐다. 그러나 겨울에 울릉도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매서운 겨울 바람과 높은 파도 때문에 배가 자주 끊겼다. 그렇게 어렵게 닿았기에 울릉도의 겨울 풍경은 더욱 비밀스러웠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부작용이 걱정된다. 겨울 성인봉을 만나고 나니, 다른 겨울 산은 시시해 보여 못 갈 것 같다.

사흘 만에 열린 섬 … 순백의 도원

“내일 배가 뜰 것 같습니더. 슬슬 내려오시지예.”

울릉도산악회 최희찬(47)씨의 전화를 받고 짐을 꾸려 남쪽으로 내달았다. 포항항에서 배에 올랐다. 파도는 높지 않았다. 넘실넘실 출렁이는 건 내 마음이었다. 설산 등반을 앞둔 터라 자못 비장했다. 등산복 차림의 승객이 많은 걸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저렇게 허술해 보이는 사람도 산에 가는데 뭘’. 도동항에 내려서야 깨달았다. 대한민국이 ‘아웃도어 의류’ 강국이라는 사실을. 승객 대부분은 성인봉 산행과 하등 무관한 울릉도 주민이었다.

항구는 북적였다. 사흘 만에 배가 들어온 까닭에 모두 한 보따리씩 짐을 이고 진 모습이었다. 어떤 남자는 피자 5판을 쥐고 있었다. 항구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고, 오징어내장탕으로 메슥거리는 속을 달랬다.

“겨울 성인봉 좋지예. 근데 진짜 갈라꼬예? 제정신입니꺼?” 식당에서 만난 사람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걱정 마세요. 울릉도 산꾼들을 따라가는 겁니다.” 호기롭게 대답했다. 이튿날 내 정신이 어느 지경을 헤맬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결전의 날 등산로 초입 KBS중계소로 갔다. 울릉산악회 회원들이 단출한 차림으로 하나 둘 도착했다. “가시지예!” 그러곤 앞마당 마실 나가듯이 걸음을 뗐다. 오전 10시 햇살이 생각보다 뜨거웠다. 고작 300m 걸었는데 온 땀구멍이 열렸다. “괜히 옷을 여러 겹 입고 왔는데요.” 점퍼를 벗어 배낭에 담았다. “장담하지 마시라예. 산 속에서는 일기가 어찌 변할지 모릅니데이.” 울릉도 산꾼의 말은 정확히 세 시간 후 현실이 됐다.

찬찬히 산을 오르고 있는데, 앞서가던 등산객 무리가 보였다. 별다른 장비도 없이 산을 덤빈 사람들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이래 갖고 우에 성인봉 가겠다는교? 우리 뒤로 붙으이소!” 11명이 한 줄로 나란히 산을 탔다.

눈은 모든 경계를 지워버렸다. 길과 길 아닌 것을 알아챌 요량이 없었다. 푸름을 자랑하던 마가목과 너도밤나무·우산고로쇠나무는 앙상하게 줄기만 남았다. 오로지 하얀 바탕의 산에는 나무와 나무 그림자, 그리고 우리가 발로 다진 길만 있었다.

(2) 나리마을 표지석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3) KBS 중계소에서 내려본 도동항. 여객선이 드나드는 곳이다.
(4) 알봉분지 지나는 길, 낙조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눈 한 움큼 떠 라면 끓여 먹는 재미

출발 두 시간 뒤 팔각정에 도착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간식을 먹고 저 아래 저동항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스키를 신은 최희찬씨는 한참 뒤에나 나타났다. 성인봉을 수백 번 올랐다는 그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자, 인자부터 본격적인 전투입니데이.” 울릉산악회 이경태(53)씨가 선두로 나섰다. 산악회 회원들은 수시로 선두를 바꿔가며 가파른 비탈을 탔다.

바람등대를 지날 즈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는 금세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구름을 보니 기세가 꺾일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여서 점심 묵고 가시지예.” 성인봉을 1㎞ 앞둔 지점, 뭍에서 온 손님을 맞는다고 산악회에서 거한 상을 차렸다. 스키 플레이트를 조리대 삼아 버너를 얹고 삼겹살을 구웠다. 눈 한 움큼 떠서 라면도 끓였다. 식후에는 봉지커피 다섯 개를 냄비에 넣고 팔팔 끓여먹었다. “이 맛에 겨울 산에 오는 거 아니겠는교.” 뜨끈한 걸 들이키니 산꾼들 사이에도 훈훈함이 더해졌다.

다시 길을 뚫으며 산을 올랐다. 정상까지 남은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릎까지 차던 눈은 어느새 사타구니까지 올라왔고, 눈발은 칼바람에 실려 따귀를 때렸다.

“자, 이제 300m 남았으니 선두로 서보실랍니까?” 한광열(50) 울릉산악구조대장이 나더러 러셀(Russel·선두가 눈을 헤치며 등반하는 것)을 해보라고 했다. 미시령에서 눈 깨나 치워본 육군 예비역 병장으로서, 이쯤이야 하고 덤볐다가 50m도 못 가서 백기를 들었다. 눈을 차면서 발끝과 무릎으로 길을 다지는 일은 다져진 길을 걷는 것보다 세 배, 아니 다섯 배는 힘들었다.

허벅지가 떨려오고, 땀과 눈으로 온몸이 후줄근해졌을 무렵, 눈꽃 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눈마당이 나타났다. 성인봉 정상이다. 표지석은 성(聖)자만 남기고는 눈에 잠겨 있었다. 1m 이상 눈이 쌓였다는 얘기다. 날이 좋을 때는 독도까지 보인다는데 시계가 너무 어두웠다. 구름이 아래서부터 산을 삼켜왔다. 눈발이 아래에서 위로 솟아올랐다. 이럴 땐 ‘눈이 오른다’고 해야 하나?

성인봉 표지석이 성(聖) 자만 남기고 눈에 잠겼다.(위의 사진) 맨몸으로 즐기는 썰매는 성인봉 트레킹의 백미다.
맨몸 썰매를 타고 내려오다

오후 3시, 예상보다 정상 등반 시간이 늦었다.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한쪽에서는 최희찬·이경태씨가 스키를 고쳐 신었다. 보통 하산할 때는, 오를 때보다 시간을 1.5배 잡으라고 하지만 성인봉에선 예외였다.

“주머니는 다 잠그셨지예. 슬라이딩하다가 다리를 오므리믄 브레키가 걸립니더.”

스키 신은 두 명은 나무 사이를 활강했고, 나머지는 맨몸으로 썰매를 탔다. 눈에 습기가 적은 파우다 스노여서 죽죽 미끄러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걸어서 내려오는 것보다는 훨씬 빨랐고, 신났다.

걷기와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며 알봉전망대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완만했다. 길의 좌우엔 산 비탈에서 볼 수 없었던 해송이 우거졌다. 바다가 멀지 않은 것이다. 나리분지 초입, 조그만 투막집(울릉도의 통나무집) 앞을 지나는데 낙조가 장관을 이뤘다. 분지를 에워싼 봉우리마다 산불이라도 난 듯 황홀하게 채색됐다.

“저, 저, 보소. 빛이 미륵산, 형제봉 넘어 젖봉으로 넘어가네예. 봉긋 솟은 것이 열일곱 살 소녀 찌찌봉, 그 옆에 쭈글쭈글한 것이 할매 찌찌 봉임더.” 울릉도 산꾼들도 이런 빛은 몇 년 만에 본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순식간에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17가구가 사는 나리분지 마을은 툭하면 교통이 끊겨 고립되기 일쑤다. 도동행 버스가 다니는 천부까지는 4㎞ 거리다. 택시를 타려 해도 천부로 가야 하는데 밤길을 더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나리분지에 단 한 대 있는 사륜구동 트럭이었다. 곤죽이 된 일행은 짐짝처럼 짐칸에 실려갔다. 덜그럭덜그럭 트럭이 언덕을 오르는데 누군가 옅은 입김을 내며 말했다.

“달 조옿다!” 모두 동그랗게 떠오른 달을 망연히 바라봤다. 달만 좋은 게 아니었다. 별도 아름다운 이국의 밤이었다.

여행 정보

성인봉 겨울 산행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방한복과 방수 등산화에 아이젠·스패츠·등산스틱은 필수다. 산 좀 탄다고 하는 이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안전하다. 울릉산악회에서 주말마다 러셀 작업을 한다. 산악회와 함께하거나 다져놓은 길을 가면 된다. 겨울에는 도동 KBS중계소~팔각정~성인봉~나리분지 코스가 무난하다. 6시간 코스지만 적설량에 따라 그 이상 걸릴 수도 있다. 이번엔 8시간을 걸었다. 산악회 인터넷 카페(cafe.daum.net/ulac)에 관련 정보가 많다.

울릉도의 풍성한 향토음식도 놓칠 수 없다. 싱싱한 오징어 내장으로 끓인 오징어내장탕은 오징어의 고장 울릉도가 아니고선 만나기 힘든 맛이다. 도동에 있는 ‘99식당’이 23년째 오징어내장탕을 하고 있다. 8000원. 054-791-2287. 울릉도 앞바다에서 건진 주먹만 한 홍합을 썰어 넣은 홍합밥도 울릉도를 대표하는 별미다. 홍합밥과 홍합죽만 파는 ‘보배식당’이 유명하다. 홍합밥 1만5000원. 054-791-2683. 산약초를 먹고 자란 약소고기도 빠뜨릴 수 없다. 울릉도 주민에게 그날 잡은 약소가 어느 식당으로 갔는지 물어서 찾아가면 된다.

울릉도 가는 배는 포항·강릉·동해에서 탈 수 있지만 겨울에는 포항에서만 다닌다.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배가 뜨는데, 당일 오전 7시나 돼야 출항 여부를 알 수 있다. 대아고속해운(daea.com)에서 배를 띄운다. 운임은 날짜에 따라 다르다. 어른 약 7만원(편도). 1544-5117.

글=최승표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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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