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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제자=김홍일>|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야부 토벌대에서 끝까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을 추적했던 장도공작대장은 그 김일성의 얼굴도 경력도 잘 알면서 그 김일성과 북한의 김성주가 동일인물인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항일연군의 고위간부는 다 사살되었거나 체포 또는 투항했는데 김일성만은 용케도 살아남아서 입소해 버렸다.
1940년 12월과 1941년 1월 사이의 일이었다. 토벌작전이 끝나자 나는 북지로 전근했기 때문에 입소후의 소식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쨌든 살아남아서 종전 후에 북조선에 돌아와 수상까지 하고 있으니 대견스럽다. 지금 김혜순 이라곤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우리내외는 가끔 김혜순이 이야기를 한다』라는 것이었다.
<최용건·최현도 소로 도주>
필자는 장도가 북한의 김성주를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알고있는데 놀라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오히려 동일인이 아닌 가고 반문한다. 장도는 이름이 같은 김일성이고 김성주도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웠다하고 또 김성주의 전기를 보니까 장도공작대가 했던 일을 그대로 적어놓고 있기에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김성주 전기의 어디어디를 읽어보았는가 고 물었다. 그는 야부 토벌부대에 관한 대목만 읽었고 다른 곳은 시간이 없어 아직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전기에는 김성주는 길림에서 육문 중학교를 다녔으며 간도폭동사건에도 관계없고 더우이 탈옥, 입소 적군사관학교졸업 등 경력은 전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지적해 주었다. 장도는 깜짝 놀라면서 그럼 딴사람이 아니냐고 한다. 김성주의 사진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사진을 그의 앞에 나란히 내보았다. 그는 한참 들여다보더니『아무리 그때는 여위었고 지금은 살쪘다하더라도 이것은 같은 인물이 아닌데요』라고 하면서 커다란 놀라움과 깊은 회의를 감추지 못했다. 자기는 그저 같은 사람이려니 생각했지 이런 줄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광수란 사람이 가져간 사진의 김일성은 키가 작아서 그의 처 김혜순 이랑 또 다른 여대원이랑 키가 비슷할 정도였다고 한다. 북한의 김성주의 키를 묻기에 1백70㎝가량이라 알려주었더니 그럼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것이다.
장도부처가 김혜순의 소식을 궁금해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방 후 평양에 김성주가「김일성」이라 자칭하면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 여인이 만주에서 평양의 김성주를 만나려왔던 일이 있다. 자기가「김일성」의 처라는 것이었다. 만나보니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그 여인은 투옥됐다고 하는데. 그가 김혜순 일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장도부처는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듣더니『그렇겠군요. 북한의 김일성은 토벌작전 때의 김일성이 아니니 김혜순의 남편일 수가 없어요』라고 하면서 꼭 김혜순의 소식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소련으로 도주한 2대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연군대원들의 소식은 1941년 7월13일 연길 현광개촌 왕 동포에서 체포된 제2방면군 제4연장 오갑룡, 동년 8월11일 혼춘현두황자동방 지점에서 체포된 제2방면 군대 원 이자민, 1942년 6월4일 혼춘현유수하자 근처에서 체포된 제2방면 군 경위 연 정치위원 이봉록 등에 의해 비로소 파악되었다. 이들은 소련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무장간첩으로 파견되어왔던 자들이다. 만주에 있던 항일연군으로서 소련에 도망친자들은 모두 합해서 3백명 가량이었다. 제2노군 총 사령 주보중과 그 참모장 최석천(최용건)은 벌써부터 입소해 있었고 제3노군 총 사령 장도전도 입소해있었다.
<밀입국혐의 수감되기도>
제일 늦게 입소한 제1노군 대원들은 1940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서 입소했다. 이들은「오케얀스카야」에 수용되었는데 그 순서를 보면 1940년 11월중엔 제1노군 총사령부소속 서철 이하 5∼6명, 제3방면군제13단 정치위원 최춘국·황춘빈 외 12∼13명, 제2방이군 지도원 황광림 및 동 경위연장 지갑용 외 부상자 5명이, 또 동년 12월중엔 제2방면군 제8단장 장장상 및 제3방면군제13단장 최현 외 23명, 5, 6일 후에 제1노군 경위여 제3단 정치위원 최옥춘 외 6∼7명, 10일 후에 제1노군 총사령부 소속 진수명과 제3방면 군배장 임남철 외 1명이, 또 1941년 1월엔 제2방면 군대 원 약 20명, 동년 2월엔 안도현미혼진지후린호 부근에서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던 제1노군 후방군중 약 10명이「블라디보스토크」근처의「오케얀스카야」에 있는 야영학교에 수용되었다. 이들 속에 김성주와 그의 처 김정숙도 끼여 있었다.
제2방면군장인 2대 김일성은 약 20명 가량의 대원과 함께 1940년12월에 입소했으나 소련 측과 연락 없이 입소했기 때문에 일단「워로시로프」(니코리스크)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주보중의 입회로 신분이 확인되어 대원들은 먼저「오케얀스카야」에 보내지고 2대 김일성만은「하바로프스크」에 가서 여러 가지 조사와 지령을 받은 다음 다른 항일연군외 간부들과 함께 1941년 2월에「오케얀스카야」의 야영학교에 수용됐다. 이 간부들 중에는 제2노5군장 자세영, 등 정치위원 이 청, 제3방면 군 참모 겸 제14단 정치위원 안상길 등이 있었다.
당시 제1노군 계와 제2노군 제5군 계는「오케얀스카야」또는「워로시로프」에, 그리고 제3노군 계와 제2노 군계 주력은「하바로프스크」에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소련내무상(상은「베리야」)연해주지구경비대사령관「스티코프」중장 휘하에서 소련장교의 지도로 학교 식 집단훈련을 받든지 특별히 선발된 자는 특별수용소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집단훈련을 받은 수용소를 야영학교라 불렀다. 무전기술·낙하산훈련 등 특수훈련은 소련장교가 담당했고 정치·군사 등 일반과목은 연군간부들이 담당했다. 특수훈련이란 것은 첩보요원훈련이었다. 소련에서는 이들을 전에 활동하던 만주의 연고지에 침투시켜 일만 측 동향의 각종 정보를 수집케 했으며 동시에 소-일 개 전 때의 후방교란요원으로 교육시키고 있었다. 김성주도 이 교육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새 지령을 받고「오케얀스카야」의 야영학교에 수용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제1노 군에서 입소한 자들 중에서는 제일 고위 간부였다.
「오케얀스카야」에 도착한 김일성은 제1노군 계를 제1지대로 편성, 그는 제1 지대 장 겸 제1중대장을 맡았고 그 제2중대장은 안상길이 맡았다. 그리고 제2노군 제5군 계는 제5지대를 편성, 자세영이 그 장이었다. 김일성에게 입만 공작 지령을 내렸다. 무전기 1대와 무장을 갖춘 제1중대 약 30명을 이끌고 김일성은 1941년3월에 동녕·혼춘현경을 거쳐 입만, 5월 하순엔 안도현비구 근처까지 진출했다. 목적은 제1노 군부사령 위극민과 전광(오성륜) 동 상부와의 연락 때문이었다.
<김 책은 입소 않고 만주에>
그러나 그때는 이미 위는 죽었고 오성륜은 체포된 후였으니 연락이 될 수가 없었다. 그 해 7월 중순 김일성은 제1분대장 황춘빈 외 8명만 데리고 일단「오케얀스카야」로 돌아갔다.
그새 독-소 전쟁(1941년 6윌22일)이 일어났다. 김일성은 독-소 개 전에 따르는 일본군의 동정탐지와 민중공작의 거점설치 등 목적으로 그 해 8월 상순에 재차 입 만했다. 계청·안상길 등도 입 만했다. 그러나 이들은 11월께는 모두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 후부터 소련 측은 2∼3명씩의 무장간첩을 만주 또는 한-소 국경 쪽으로 침투시켰으며 그 중에는 김일성의 부하들도 있었으나 모두 잡혔다. 제2노군 총 사령 주보중은「하바로프스크」야영학교의 책임자였으며 제l노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오케얀스카야」야영학교의 책임자 겸 군사·정치과의 교관이었다. 동북 항일 연군 안의 한인간부로서 1943∼4년께까지도 만주 안에 남아 있는 자는 북만의 제3노군 총 정치위원이었던 김책 정도이다. 그는 그때 중공당 북만성위 서기를 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오성륜이 체포된 후에는 만주의 중공당과 항일연군에서 한인으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그도 1940년 12월엔 일단 입소했다가 1941년 6월께 부하8명과 함께 다시 입만, 북하·안나하 상류지방을 유동하면서 북만당을 지도, 민중공작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해방 때까지 북만에 머물러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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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