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42)항일연군의 최후|이명영(성대교수 정치학)<제자=김홍일>

항일연군 제1노군에 대한 섬멸작전인 동남삼성치안 숙정 공작은 그때까지의 일만 군경의「토벌」작전 중에서는 가장 본격적이고도 대규모의 작전이었다. l939년10월에 총공격이 시작되자 6개월이 지난 1940년 봄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연군 측의 패색은 감출 수 없게 되었다. 1940년2월23일에 총사령 장정자가 천강현성 남쪽의 490고지에서 전사한 것이다.
<북괴선 양사령에 언급 없어>
그는 공격이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부사령 위극민·비서처장 겸 군수처장 오성륜·참모 방진성·제3방면군13단장 최현 등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일만 측의 맹공격 때문에 한데 몰려다닐 수가 없게되자 서로서로 헤어져 행동했는데 전사할 때는 수병 몇 사람밖에 거느리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히 포위되어 투항의 길밖에 없었는데도 끝까지 응전하다가 전사했다.
양정우의 본명은 장관일, 당시 37세로 알려졌으며 하남성 신양 출신이었다. 인양 제3사범학교 학생으로서 장개석의 북벌 때 중공당 당원으로 이에 참가했으며 그후「모스크바」공산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 와서 하남성 일대에서 공산운동에 몰두하다가 9·18만주사변이후 중공당 중앙의 지령으로 입만, 「하르빈」시당서기를 거쳐 1933년 반석의 한인유격대를 기초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동북항일연군 제1노군의 전신)을 조직한 이래 동변도를 근거지로해서 악착같이 싸워온 공비 동북항일연군 제1노군의 총두목이었다.
일만 측에서는 사살된 양정우를 적장이긴 하나 훌륭한 최후를 마쳤다 하여 매장하여「양정우지묘」란 비를 세워주고 불승으로 하여금 위령케 하는 한 가닥 선심을 썼다. 중공에서는 이 지역을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북한의 역사책에는 재만중·한인공산유격대의 총사령이었던 이 양정우에 관해서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뿐 아니라 양정우의 지휘하에 있었던 모든 일을 오히려 김성주의 지휘하에서 일어났던 일로까지 날조해 놓고 있다.
<소부대로 분산…명맥 유지>
1940년3월13일부터 15일까지 화전현 제4구수곡류의 산속, 오성륜의 산업에선 제1노군의 간부회의가 열렸다. 부사령 위극민·오성륜·2대 김일성(김성주 아님)·최현·김광학·김재범(남만성위 후보위원)·한인화(제1노군 경위여참모) 등 당군 수뇌부 11명이 모인 이 회의에서는 양정우 사후의 당(남만성위)의 재건책 및 당 활동의 목표와 그리고 군의 장차 행동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당은 군안으로부터 다시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획득공작을 벌인다는 것과 군은 소부대로 분산하여 가능하면 북상, 제2, 3노군과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중공작과 당의 재건을 위해 당내에 지방 공작부를 신설하고 그 책임을 오성륜이 맡았으며 당면의 공작지구로 화전·반석과 간도를 지목하여 김재범과 김광학이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부하를 데리고 각자 맡은 지방으로 내려오자마자 전부 붙잡히고 말았다.
군의 행동방향인 북상은 포위망 때문에 불가능했고 전부 몇 사람씩의 소부대로 분산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북한에서는 이 소부대분산의 방침을 김성주가 내린 것이라고 조작하고 있다). 소부대 분산이란 것은 사실상으로는 전투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며 몇 사람씩 짝을 지어 은신처를 찾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항일연군의 군사활동은 정지된 것이다.
야부토벌대는 항일연군의 활동이 정지되었어도 악착같이 산야를 누비며「빗질작전」(머리를 빗는 식의 철저한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연군의 유기시체 1천2백82구, 투항 1천40명, 체포 8백96명, 그리고 노획된 무기와 물자는 소총 1천8백55, 권총 7백13, 중기관총 3, 경기관총 43, 박격포 1, 자동단총 5, 척탄통 7, 그리고 곡류 3천3백73섬, 밀가루 2백21부대, 아편 3천5백93냥 또 전복된 산채 2천9백23개소였다.
<간부급들도 거의 체포당해>
이상은 확인된 것에 한한 것이며 지역 밖으로 도망친자·매장된 시체·산중에 파묻혀진 무기 등을 고려에 넣는다면 더 많은 숫자가 되었을 것이다. 사살·투항·체포 등 합해 3천 여명에 달했다는 이 숫자는 제1노군의 총대원수와 맞먹는 숫자였으니 그 총 붕괴의 상황을 알 수 있다. 특히 제1노군의 지휘부간부들의 운명을 보면 그 전멸의 모습은 더욱 역력하다.
총사령 양정우의 죽음 외에도 다음과 같은 간부들의 운명이 있었다. 후국충(제2방면군 제5사부사장)은 1939년11월1일 시체로 발견, 방진성은 1940년2월15일 체포, 임참모(제2방면군참모장) 1940년2월20일 체포, 이참모(제1노군본부참모) 1940년3월5일 체포, 김해산(제2방면군지휘부부관) 1940년3월15일 체포, 장영춘(제3방면군 유격대장) 1940년3월16일 투항, 장명성(제1방면군제1단장) 1940년3월17일 투항, 황개산(제2방면군제1유격대장) 1940년4월7일 체포, 여백기(제2방면군 정치주임) 1940년6월29일 체포, 김재범 1940년7월29일 체포, 박득범(총사령부경위여장) 1940년9월29일 체포, 한인화 1941년3월13일 사살 등인데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타격은 제1방면군장 조아범(1940년4월8일 한중간의 민족적 대립으로 한인부하 김모 이하 3명에 의해 사살됨)과 제3방면군장 진한탁(1940년12월8일 사살)의 죽음과 그리고 오성륜의 투항(1941년1월30일) 및 제1노군부사령 위극민의 죽음(1941년3월8일 사살)이다.
양정우가 죽은 뒤 제1노군의 총 지휘를 맡았던 위극민은 오성륜에게 재포한인조국광복회를 조직케 했던 사람이다(31회 참조). 그는 심장병 때문에 보행하기도 어려워 1940년4월15일엔 중공당 중앙의 강생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띄워 자기와 교체할 사람을 보내달라 애원하기도 했으나 편지는 강생에게로 가기에 앞서「토벌대」측에 압수되고 말았었다.
그 편지는『대내에 사상적 동요가 심해 투항하는 자 속출하니 나 어찌하리오』하고 탄식하는 내용이었다. 모든 고급간부가 다 사살되거나 체포되는 가운데 유독 제2방면군장 김일성(김성주 아님)만은 무사했다. 그러나 투항·체포된 많은 간부들을 통해 김일성의 근거지가 차례로 전복되어갔다.
<2대 김일성 살아 소로 도망>
l940년10월에 들어서 김일성은 이렇게 쫓기어서는 견딜 수가 없으니 유격구를 바꾸어야 되겠다고 위극민에게 신청했으나 위는 소·일 개전까지 견디어야 한다고 그 신청을 허락치 않았다.
그래서 김일성은 내부 하에는 병자도 있고 사상박약으로 항일 전에 견딜 수 없는 자도 생겼으므로 이들을 입소 재교육시켜야 하겠다고 하여 입소증명서를 받아가졌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해 12월에 겨우 수병 20여명을 데리고 소련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체포·투항된 숱한 고위간부들을 통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정체가 밝혀진 가운데서도 그의 처 김혜순의 체포는 특히 유익한 진술을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
김혜순은 1939년5월의 반절구 습격 때 중상을 입은 김일성과 헤어진 후(전회참조) 수해를 방황하다가 1940년4월6일 함남대안 십삼도구의 서강성 북쪽 백암이란 곳에서 장도공작대에 의해 체포됐던 것이다. 함북태생의 그녀는 제2방면군의 여자청년부장이었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