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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제자=김홍일)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보천보를 습격했던 동북 항일 연군의 제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에 죽은 다음 한동안 김일성 부대의 활동 소식은 아무데서도 입수되지 않았는데 다음해 봄에 또다시 김일성 부대의 출몰이 현저해지기 시작했다. 일만 군경에 입수된 정보로는 장기간 소련에서 훈련받은 한 한인이 파견되어 와서 제6사의 지휘를 맡고 김일성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전부터 동북 항일 연군에 대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으나 1937년 7월 7일의 중·일 전쟁 발발을 보고 언젠가는 일본이 소련에 대한 전쟁 도발도 불사할 것이라 판단, 항일 연군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지원을 강화했던 터이다. 그 중에서도 적군 안의 한중계 군관에게 유격전과 모략 공작의 훈련을 실시하여 입만시키는 일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새로 제6사장이 되어 온 김일성도 소련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적군 군관으로 있던 자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밝혀지듯이 이 사람도 물론 김성주가 아니다.
<김성주와는 또 다른 김일성>
이 새 김일성 부대는 1938년 4월에 들어서 준동을 개시했다. 4월 26일 밤 이들은 평북 후창 경찰서 부흥 주재소 대안 임강현 제3구 육도구를 습격했다. 병력은 약 5백명의 대부대였으며 경기관총 6자루, 각자 소총과 권총을 소지했으며 5대로 나누어 나팔을 불며 시가지에 침입, 약탈을 자행했다. 근래에 드문 대부대의 습격이었다.
일인 세무서원 2명, 중국인 세무서원 1명이 즉사했고 형사 3명과 안동 영림서 육도구 출장소원인 일인 2명, 같은 출장소원인 한인 1명, 그리고 한인 주민 3명, 중국인 42명이 납치되었고 현금 2천원, 식량 1만원 상당이 약탈되는 등 큰 피해가 있었으니 근래에 드문 대사건이었다. 이는 아마 제6사 김일성 부대의 건재를 과시하여 전 사장 김일성의 죽음을 은폐하고 동시에 승명한 2대 사장의 신임을 기념하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제6사 병력만으로는 5백명이란 대부대가 될 수 없는데 5백명이나 이 습격에 참가한 것을 보더라도 타부대의 응원으로 된 전기 목적의 작전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신임 제6사장 김일성 부대의 움직임은 이 임강현 육도구 습격을 고비로 그후 별반 뚜렷한 것이 없다가 l939년 봄에 들어가서야 또다시 활발해졌다.
그간 일만 군경 측은 중·일 전쟁 수행에 있어서의 후방 치안의 공고화를 위해 동북 항일 연군 제 부대에 대한 포위 섬멸 작전을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무력에 의한 「토벌」뿐 아니라 사상 선무 공작에도 열을 올렸다. 집단 부락 제도와 그에 따르는 자위단의 강화, 항일 연군 준동 지구에 대한 교통의 차단 등으로 물자 조달을 봉쇄했다. 1939년에 접어들어 항일 연군 제2, 3노군은 대체로 괴멸된 상태가 되어 일부는 소련으로 도주했고, 일부는 북부 소·만 국경 지대에 숨어 있을 정도였다. 남은 것은 동변도(길임·통화·간도성 일대)의 산악 지대 험준한 밀림 속에 근거지를 둔 제1노군(총사령 양정우)뿐이었다.
<1노군 제2방면 군을 지휘>
이 1노군도 많은 간부와 대원들의 투항이 있었고, 또 「토벌」 때문에 병력 손실이 큰데다가 충원할 도리가 없어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1939년 초에 제1노군은 휘하 제l·2군을 통합 재편, 제1·2·3방면 군으로 군제 개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노군 밑에 군·사·단 등을 두던 종전의 편성을 유지할 수 없어서 종전의 사를 조금 규모가 큰 방면 군으로 종전의 단을 역시 사로 보강 승격시키는 조치였다. 제1방면 군장은 조아범, 제2방면 군장은 김일성이, 제3방면 군장은 진한장이었다. 승명한 2대 김일성의 부대인 제2방면 군은 1939년 봄부터 물자 조달을 위해 결사적인 습격 작전에 나섰다.
4월초 이들은 1백 50명 가량의 병력으로 장백현 칠도구 삼도양차에 잠복해 있다가 11일 밤중에 두 차례에 걸쳐 신성파 대안 장백현 십도구 구기점 부락을 습격, 옷가지와 식량을 약탈하고 한인 다수를 납치하여 오지로 철수해 갔다. 또 26일엔 평북 대안 장백현 십오도구 대동리 부락을 습격하고 경찰대와 1시간 동안 교전했다.
항일 연군안의 2대 김일성이 이끄는 제2방면군이 1939년 봄에 전개했던 전투 중에서 가장 격심했던 것이 반절구 습격이다. 5월 3일 밤 9시께에 김일성 부대 2백여 병력은 함남 삼수군 호인면 대안의 반절구를 습격하고 만경과 4시간 동안이나 격렬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경관과 주민 40여명을 살상하고 다량의 식량과 의류를 약탈했었다. 김일성 부대에도 심대한 손실이 있었는데 특히 이때 김일성은 중상을 입고 부대가 오지의 근거지로 철수할 때 행동을 같이 하지 못하고 그의 처와 함께 뒤로 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 김혜순은 40년에 피체>
이 뒤에 처진 김일성 부처의 은신, 또는 무사 귀환을 엄호나 하듯이 제2방면군은 5월과 6월에 걸쳐 장백현 일대의 국경 지대를 여러 대로 나뉘어 거세게 출몰했다. 모두가 김일성 부대라 칭하면서 물자를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하는 등 활발한 양동 작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러는 사이 중상을 입은 김일성과 그의 처는 울창한 수해 지대를 숨어 가면서 전전하다가 헤어져서 행동하게 되었다. 중상을 입은 사람과의 동행은 눈에 띄기 쉽다는 배려에서였다. 이 김일성의 처 김혜순(제2방면군 여자 청년 부장)은 1940년 4월에 체포된다. 따라서 승명한 2대 김일성의 정체도 파악된다.
한편 관동군에서는 1938년 7월에 있었던 장고봉 사건, 또 1939년 9월에 있었던 노몽한 사건 등에 있어서 소련과 두 차례에 걸쳐 충돌을 경험한 데다가 그때마다 소련의 우세한 무력 앞에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그리고 중국 본토에 있어서의 중·일 전쟁의 전선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소련의 강력한 지원으로 준동을 계속하는 항일 연군 부대를 섬멸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그래서 전개된 것이 동남3생(길림·통화·간도) 치안 숙정 공작이다. 관동군의 야부창덕 소장을 토벌 사령으로 한 일만 군·경·민 일체의 일대 섬멸 작전이었다.
<독립군·마적떼 거점은 수해>
동남3성은 광의의 동변도로 불리는 지역인데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장백 산맥이 남북으로 달리고 노령 산맥이 동서로 달려 산악이 중첩하며 수해라 불리는 대 밀림지대가 이어져 있어 방어하기는 쉬워도 공격하기에는 아주 어려운 자연의 요새지였다. 예부터 우리 독립군의 근거지였기도 하고, 또 각종 비적떼도 여기에 반거 하던 곳인데 항일연 제1노군 휘하 3개방면 군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제1노군 총사령은 양정자, 부사령은 위극민, 총사령부 비서처장 겸 군수처장은 전광(오성윤)이었으며 휘하 병력은 약3천명이었다.
이 작전은 1939년 10월 1일에 시작되어 1941년 3월까지 1년 6개월이 걸렸는데 이로써 항일 연군은 전멸된다. 【이명영 집필(성대 교수 정치학)】
<차례>
제 6장 북경 항일 연군내의 2대 김일성
(41)2대 김일성의 입만과 그 부대의 군사 활동
(42)항일 연군의 최후
(43)2대 김일성의 정체(Ⅰ)
(44)2대 김일성의 정체(Ⅱ)
(45)입소한 2대 김일성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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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