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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제자=김홍일-6사장 김일성의 죽음

보천보 습격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이 북한의 김성주와는 딴사람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혜산사건의 취조 책임자였던 시원경부의 말처럼 제6사장 김일성이 누구인가를 잘 알고있던 박금철은 그것 때문에 김성주한테 이용당하다가 드디어는 숙청된 사실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때 국내조직을 동원해 6사를 도운 탓으로 검거돼, 무기징역을 살다가 해방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박금철은 그해 가을 평양에 「김일성」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6사장 김일성인 줄 알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가서 「김일성」 을 자칭하는 김성주를 만났으나 김성주는 박금철을 몰라봤다. 거꾸로 박금철은 김성주로부터 일본 놈과 협력한 배반자란 낙인만 받았다. 그때 그 자리엔 여운형의 심부름으로 김성주를 만나러갔던 현 내외문제연구소장 이기건씨가 동석했었다.
<박금철을 몰라본 김성주>
사람이 다르니 서로 알아볼 턱이 없었다. 그래서 박금철은 평양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평북의 산골 고을인 강계로 가서 강계군 당 조직부지도원으로 겨우 일자리를 구했었다. 박금철이 제힘으로 군 당 조직부장까지 되었을 때 행정구획의 개편으로 자강도가 새로 생기고 강계가 그 도 소재지의 시가 되자 강계시당의 비중이 커졌다. 뿐 아니라 6·25동란 직전에 군의 증설과 군 문화부의 강화로 강계에 새 사단이 생겼고 도 소재지 시당 조직부장이 사단의 문화부 책임자가 되게 되어있었으므로 박금철은 자동적으로 새 사단의 문화부책임자(정치담당 부사단장)가 되었다.
「유엔」군의 진격으로 군 문화부의 총사령이었던 김일이 전선을 이탈하자 박헌영이 중장의 군복으로 문화부를 인민군 총 정치국으로 개편, 그 사령으로 취임하고 박금철을 기용해 총 정치국 차장으로 임명했다. 이래서 박금철은 비로소 별 하나(소장)를 달고 중앙정계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이다. 박금철은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박헌영의 직계인 정태식과 벽 하나 사이로 알게 되어 해방직후 박헌영의 공산당에서 일할 연분이 있는데 「김일성」소식 때문에 월북했던 처지다.
박금철은 인민군 총 정치국의 박헌영 밑에 있으면서 남로당 간부들과 널리 접촉했다. 그후 박헌영·이승엽 등이 체포되자 남로당원 출신들의 동요가 심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남로당계와 친분이 많고 또 박헌영에 의해 중앙정계에 들어왔던 박금철이 비로소 중앙당부장으로 임명됐다. 박금철은 간부부장으로도 우직하게 일을 잘하여 김성주의 비위에 맞았다.
<김의 경력 절대화에 이의>
그러다가 56년 반 김성주 운동으로 김두봉·최창익·박창옥 등 거물급이 숙청 당하자 박금철은 당부위원장에 오를 수 있었다. 이걸 보고 관측자들은 갑산파니 뭐니 해서 김성주와 박금철의 관계를 보천보사건 이래의 연분인 줄 해석하기도 했으나 이 해석은 전혀 근거 없는 중대한 오판이었던 것이다.
박금철은 김성주의 경력을 절대화하는데 이의를 품은 탓으로 숙청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숙청 당할 운명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김성주의 거짓 경력의 중대한 부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금철이 김성주의 인정을 못 받았을 때 고향인 갑산으로 내려가지 않고 강계에 갔던 이유도 알만하다. 갑산에 가면 옛 동지·부하들이 수백명이나 있는데 김성주가 보천보사건의 제6사장 김일성이냐 아니냐하는 화제가 나올 것은 틀림없고, 또 왜 중앙에서 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올 것이기 때문에 구설수를 피하려면 아예 딴 고장으로 가는 것이 처세상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6사장 김일성은 1937년11월13일에 만주에서 사살되었다는 사실이다. 시원경부를 비롯한 많은 증언자들로부터 이 김일성은 사살되었다는 틀림없는 소식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필자는 관동군과 만주군경의 동북항일연군 「토벌」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만주국군관계자들이 펴낸 『만주국군』이란 책에는 김일성은 1937년 11월13일 무송현양목정자(무송과 안도의 중간지점)라고 하는 1천m의 고지산중에서 부하 약 1백명과 같이 식사를 위해 휴식을 하다가 만군보병 제7단제1영의 포위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또 당시의 전투상황과 모든 정보로 보아 김일성이 사살된 것은 틀림없었으며 따라서 그후 몇 개월 동안 김일성 부대의 동정은 전혀 감감무소식이었는데 1938년 봄에 들어서 또 다시 김일성 부대의 출몰이 현저해진 점으로 보아 사살된 김일성이 바로 쫓기던 김일성인지 그후 나타난 김일성이 정말 김일성인지 수수께끼로 남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이 김일성의 죽음의 진부를 가려내기 위해 숱한 만군관계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사살된 김일성의 목(수)을 검증했던 전만군장교를 일본의 구주 박다시에서 찾았다. 73년 여름 단출한 「아파트」방에서 「야기·하루오」(팔목춘웅)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만군부대는 한인들이 많이 섞인 부대가 양목정자 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얻고 마침 김일성 부대가 관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도 있었던 터이므로 필시 김일성 부대 일 것이라 판단하고 따라갔다.
<"일제조작"이라 적반하장>
아침식사준비를 하느라고 쉬고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복을 입은 여대원 5∼6명이 재봉 일을 하는 것도 보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가서야 교전이 벌어졌다. 대장인 듯한 사람이 총에 맞고 쓰러지자 「김 사령사료」를 연발하며 공비대원들이 반격해왔다. 죽은 김사령(사장을 사령이라 부른다)의 시체를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기 5시간 여에 공비부대는 김사령의 시체를 버린 채 도주해 갔다. 목(수)실험이란 것은 시체가 누구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담당했던 것이다.
1936년6월과8월의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 부대가 산영자란 부락(양목정자에서 좀 떨어진 곳)을 습격했을 때 부락민을 모아놓고 김일성이 직접 선전연설을 한 일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김일성의 인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보였더니 틀림없는 김일성 사장이라는 것이었다. 나이는 내보기에는 35∼36세 가량이었다고 기억한다.』 팔목춘웅씨는 만군기관지 월간『철심』이란 잡지도 보여주었다. 그 속에 「김일성 비토벌상보」란 기사가 있었다. 김일성의 죽음을 확인하는 자세한 전투기록이었다. 김일성이 35∼36세 가량의 사람이었다는 팔목씨의 증언은 시원경부의 증언과도 상부한다.
만군장교였던 팔목씨는 김일성 부대의 보천보 습격에 관해서는 모르고있었다. 그는 한 장의 명함을 꺼내 보이며 이 사람을 아는 가고 물었다. 동경에 있는 「조선문화연구회 유광수」의 명함이다. 『이런 사람이 몇 해전에 찾아왔었다. 자료를 보여 달라해서 보여줬다. 북조선계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실제 경험자들이 있는데 자료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고 물었더니 북조선지도자들은 날짜라든가 장소 같은 것을 잘 기억 못하는 수가 있다고 하더라. 내가 그에게 김일성은 만주에서 사살된 일이 있는데 북조선의 김일성은 그 후계자인가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는 화를 내면서 죽었다는 것은 일제의 터무니없는 조작이라고 하더라. 나는 어처구니없어 웃고 말았다.
<불리한 증언자엔 협박도>
좀더 합리적인 설명이 있을 법도 할텐데 엄연한 사실을 일제의 조작이란 말 한마디로 부정해 버리는 것은 연구가답지 않았다』라는 것이 팔목씨의 말이다.
필자는 자료수집을 위해 찾아간 일본의 곳곳에서 이미 나보다 몇 해전에 유광수란 사람이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사해 봤더니 그는 조총련의 이면조직인 「김일성 문제담당부」의 행동대원이었다.
이 조직은 일본에서 이용가치 있는 자료를 수집하여 북송하며 불리한 자료를 없애버리거나 불리한 증언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협박 혹은 회유하는 일을 하고있다. 부장은 박춘일(「일본문학에 나타난 조선인상」의 저자)로 알려져 있고 그들은 과거 수년간에 걸쳐 조직적이고도 정력적인 자료수집을 했다. 그 자료들을 토대로 해서 1968년에 김성주의 조작적인 전기가 출판된 것이다. 【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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