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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당장 성과 내려고, 씨앗을 먹어요?

지난달 21일 대전 유성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선 정규직 연구요원 24명을 뽑는 공채가 진행됐다. 이날 하루에만 이곳에 300여 명의 박사급 지원자가 몰렸다. 이 중 100명가량은 삼성종합기술원· LG디스플레이 등 대기업 그룹 소속 연구원이었다. 이날 지원서를 낸 삼성 출신 40대 연구원은 “회사 연구소가 긴호흡을 요하는 중장기 연구 프로젝트를 대폭 줄이고 연구인력을 사업 부문으로 재배치하고 있다”며 “안정적인 연구를 위해 연봉이 깎이는 걸 각오하고 ETRI에 지원했다”고 털어놨다. 면접관을 맡았던 ETRI 남은수 부품소재연구소장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대기업 연구소 출신 엘리트 연구원들의 이력서가 수백 장씩 쌓여 있다”고 말했다.



단기과제 집중하는 기업들
삼성·SK·LG 등 실적 중시
장기 연구 인력 분산 재배치
해외 기업은 투트랙 고수

 삼성·LG·SK 등 국내 대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차세대 주력 사업을 찾으려는 호흡이 전에 없이 짧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중장기 연구개발(R&D)을 맡아온 기업 내 조직들이 축소 또는 사라지거나 관련 프로젝트들이 좌초 위기를 맞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경쟁이 갈수록 격화되면서 언제 성과를 거둘지 모르는 중장기 연구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있는 삼성종합기술원은 지난해 9월부터 석·박사급 연구인력을 기존 1500명에서 절반 수준까지 줄여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종기원 연구인력 중 상당수가 최근 문을 연 인근 수원의 모바일연구소나 전자소재연구단지 등 당장 상용화하거나 가까운 미래기술을 연구하는 부서로 분산 배치되고 있다.



 종기원은 삼성그룹의 10년 후 미래 신사업을 연구해왔다. 삼성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춘 반도체· 스마트폰의 기반 기술도 상당 부분 이곳에서 탄생했다.



삼성 관계자는 “종기원은 10년 후 삼성을 이끌 ‘수종(seed) 산업’에 대한 기술을 연구하는 곳”이라며 “최근 들어 연구가 무르익고 상용화가 가까워지면서 사업부서와 가까운 곳으로 인력이 전진 배치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삼성그룹의 대표적 경제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SERI) 역시 종기원과 상황은 엇비슷하다. SERI 홈페이지(www.seri.org)에는 지난해 11월 이후 연구 내용 업데이트가 사실상 중단됐다. 그간 중점을 둬온 거시 전망 대신 산업별 분석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틀면서 이에 맞춰 조직 및 기능을 개편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강점을 보였던 사회적 어젠다 발굴이나 성장률·환율·금리 등 거시경제 예측 대신 스마트폰 이후 신성장동력과 애플, 중국 업체 등을 대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경쟁의 전술’ 마련에 더 집중하겠다는 포석이다.



 국내 이동통신업계 1위인 SK텔레콤은 2010년 시간표가 각각 다른 3개의 경영전략 부서를 만들었다.



 향후 10년 정도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적 경영전략을 짜는 미래경영실과 향후 3~5년의 전략을 짜는 경영전략팀, 2년 안팎의 전략을 짜는 사업전략팀이 그것이다. 하지만 ‘미래경영실’은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지난해 초 비슷한 기능을 맡는 ‘미래전략실’로 다시 부활했지만 지난해 말 조직개편에서 또다시 경영전략실로 합쳐지는 등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미래전략실에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원래 중장기 방향을 찾는 미래 전략 조직은 기복이 있다”며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연구를 하다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조직이 축소됐다가도 필요에 따라 다시 만들어지는 일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기업들의 R&D 전략이 ‘단타형’으로 바뀌는 조짐을 우려한다. 국책연구원의 한 수석연구위원은 “미래를 내다보는 기초 연구를 줄이고 눈앞의 전략만 세우다 보면 결국 다음 먹거리를 찾지 못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며 “농부가 겨울나기에 힘들어 이듬해 봄에 뿌릴 씨앗까지 먹어 치우는 것(seed-corn eating)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많은 글로벌 기업은 단기 과제와 중장기 과제를 병행하는 ‘투 트랙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21년 연속 미국 특허 등록 1위를 기록하고 있는 IBM이 대표적이다. IBM은 장기적인 R&D 전략을 유지하면서도 관련 연구가 기술의 상용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구체계를 잘 세우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차세대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인공지능 컴퓨터 왓슨과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분석 사업 등이 그 성과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노환진(융복합대학 기초학부) 교수는 “국내 기업들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영 환경 탓에 기초연구를 미루거나 축소하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국책연구원이나 대학이 그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실정은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최준호·김영민 기자



◆씨앗 먹어치우기(seed-corn eating)=겨울나기가 힘들어 이듬해 봄에 뿌려야 할 씨앗까지 먹는다는 뜻. 기업이나 국가가 눈앞의 이익이나 위기 해결에 급급해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단기적인 해결책에 주력할 때 쓰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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