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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항일 연군과 소련|이명영 집필(성대 교수 정치학)<제자=김홍일>

동북항일연군의 행군대형은 언제나 일렬종대였다. 눈 내린 겨울 같은 때는 모두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밟아 꼭 한사람이 왔다간 것 같이 위장했다. 뿐만 아니라 맨 뒷사람은 일부의 신발을 거꾸로 신어 왔다간 방향을 전혀 반대쪽으로 알게끔 했고 때로는 맨 뒷사람이 빗자루로 발자국을 쓸어버림으로써 전혀 행방을 모르게끔 하기도 했다. 촌락을 습격할 때 수 개의 소부대를 동시 다발적으로 인근일대에 출몰시키고 각대가 똑같은 부대 명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한 부대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것 같은 작전도 잘 썼는데 그래서 두목이 몇이 있는지 모르겠다느니 축지법을 쓴다느니 신출귀몰 하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왔었다. 이런 것이 다 마적 대들의 오랜 전통에서 유래한 것인데 항일연군에서도 이런 방식을 도습 했었다.
<두목 죽으면 이름 계승>
이 축지법이니 신출귀몰이니 하는 작전 법은 동북항일연군에 앞선 우리의 독립군들도 잘 썼던 전법이다.
전설같이 전해져온 옛「김일성 장군」(본 연재 끝장에서 다룸)의 전법이 그 대표적 예이다. 동북항일연군에서는 이와 같은 전법을 더욱 조직적으로 잘 썼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러한 전법들이 모두 김성주에 의해 창안되고 전개된 것이라고 자랑한다. 완전한 거짓이다. 만주의 중공 당이나 동북항일연군들이 한 일들을 모조리 김성주가 한 양으로 꾸며놓은 판이다.
또 마적 대에서는 자기네 두목은 죽지 않는 초인적인 사람이란 미신을 퍼뜨림으로써 자기들의 위력 과시를 꾀하는 수법도 썼다. 따라서 그들은 두목이 죽더라도 그것을 엄비에 붙이고 대를 잇는 두목으로 하여금 전대의 이름을 계승케 했다. 이 승명은 그 지대 일대에 이미 다져놓은 자기들 위력을 계속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는 심리전법이었다. 마적대의 이러한 심리전법도 항일연군에서는 도습했다. 그 좋은 예를 항일연군 제2부 제6사장 김일성(김성주 아님)과 제2군 제4사 제1단장 최현이 죽은 뒤의 승명에서 보게될 것이다(만주의 마적에 관한 연구저서로는 1930년 이전에 이미 여러 책이 나온 것이 있다. 어떤 것은 일본의 대천낭인이 직접 마적 떼에 뛰어들어 두목노릇까지 한 체험담에서 써진 것도 있다. 마적의 두목으로서의 대표적인 인물은 동북정권의 왕좌까지 올랐던 장작림이었다).
<중·일 전쟁 후 소 지원 적극>
항일연군은 처음엔 만주성 위를 거쳐 중공 당 중앙의 지령 하에 있었으나 만주의 치안이 점차 확립됨에 따라 관내와의 연락이 여의치 못해진데다가 일의 대수의 「우수리」강, 흑룡강을 넘으면 곧바로 소련과 연락이 닿기 때문에 소련의 각 기관의 직접적인 지도원조 하에 움직이는 것이 더욱 편리했었다. 소련의 「게페우」적군, 영사관, 또「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코민테른」극동위원회가 소련공산당「하르빈」현 위원회를 통해 여러 가지 지도와 공작을 담당했다. 이와 같은 소련의 지원은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더욱 적극화했다. 소련은 중일전쟁으로 필경 소·일개전이 있을 것이라 내다보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일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그 병력의 분산·교착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연군을 원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구체적 방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항일연군에 대한 소련국내 한중 계 군관의 파견 ②전황 불리 시의 입소도피 ③소련 안에서의 항일연군대원의 훈련실시(「하바로프스크」남방의 산 속에 수백 명을 수용하는 훈련소가 있었다.) ④상병자의 수용·치료 ⑤항일연군대원가족의 수용 ⑥무기·탄약·무전기 등 물자 및 자금의 지원 ⑦특별공작원에 의한 교란공작 ⑧첩보공작 ⑨군사 지도원(소련인)의 파견 등등이다.
이러한 지원책 중에서 가장 주목할 것이 소련인 군사지도 원의 직접 파견이다. 양정주의 제1노군 사령부엔 「데이노로프」를 책임자로 6명의 소련인이 배치되어 있어서 소련과의 연락은 물론 항일연군에 대한 지도감독과 첩보활동을 하고 있었다.
제1노군 제2군 제6사장 김일성(김성주가 아님)에게도 「이스라므」라고 하는 소련인 군사지도 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자는 후에 사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체포된 제6사의 참모장 서괴식·왕운장 등 증언에 의해「이스라므」는 「모스크바」북쪽10리 가량의 「우파우사타우스」출신으로 96세였음이 확인되었다.
<소련과 긴밀한 연락 취해>
이상에서 소련과 항일연군과의 관계는 지극히 밀접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측간의 연락은 노군 총사령부에서 통제하고 있어서 독단적 연락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필요에 따라서는 사장 급에서도 할 수는 있었다. 또 입소할 대원에게는 반드시 노군 사령부에서 입소 증명서를 발급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입소증명서 없이 들어간 자는 영락없이 간첩으로 취급 되었다. 이렇듯 밀접했던 소련과 동북항일연군과의 관계였으나 그것도 1941년2월엔 끝이 났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소련 측이 지원해야 할 항일연군부대가 만주 안에서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항일연군부대는 그 대부분이 사살되었거나 투항하고 나머지 극소수가 입소 도피함으로써 1941년2월 이후엔 만주 안에 소련이 인정할만한 항일연군이란 것은 존재치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경위를 잠시 살펴본다.
여러 항일부대들에 대한 일만 군경의 작전은 크게 나누어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1932년3월의 만주국 성립부터 1933년10월께까지)는 관동 군이 주동이 되어 만주국 군경을 지도·통괄하여 주로 구동북정권계 항일부대들을 공격, 섬멸하는 것이 주된 과제였던 때다. 제2기(1933년10월께부터 1936년10월께까지)에는 관동 군이 대소관계를 고려하여 치안공작의 주력을 점차 만주군경에게 이행시키고 동시에 종래의 무력공격위주의 방침을 바꿔 치안확립의 근본적인 대 민중 정치공작에 힘썼던 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만 군경의 정치공작에 못지 않게 중공당의 공작이 침투해 점차 다른 항일부대들의 세력을 흡수, 집결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등장해 왔기 때문에 새로운 대책이 필요해졌었다.
제3기(1936년10월께부터 1941년3월까지)는 소련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는 항일연군의 반만 항일통일전선의 강화확대로 일만 측 치안공작의 대장은 주로 항일연군으로 집중되고 그들 배후에 있는 소련 및 중공당에 대한 일만 측의 사상적 대결이 더 큰 문제였던 시기이다.
<김성주는 소련간일 없다고>
그 최후결산은 항일연군의 괴멸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3천여 명의 연군부대가 90%까지 피살·투항하고 극소수의 대원들이 소련으로 도주하는 것으로 일만 측의 치안공작은 완전히 끝났었다.
이후로는 만주에 어떤 이름의 항일부대도 없었다. 입소자들은 소련극동군사령부에 수용되어 장차 있을 소·일 개전에 대비한 첩보공작요원으로의 훈련을 받았다. 김성주도 그 속에 끼여 있었다. 해방 후 김성주는 평양에 와서 그것을 자랑삼아 얘기했었다. 소련서 그의 처 김정숙이 낳은 아들 이름들은 「유라」와 「슈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김성주는 소련에 간 일이 없다고 한다. 해방 때까지 만주에서 조선인민혁명군(있지도 않았던 항일부대 이름이다)을 이끌고 일제와 싸웠다는 것이다. 거짓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는 만주에서의 김성주의 항일유격전이야말로 세계에 유례없는 최고의 것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그 유격전을 지원해주는 본국도 후방도, 정규군도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의 것이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것도 거짓말일수밖에 없는 것은 김성주도 항일연군의 대원이었음이 틀림없고, 또 그 항일연군은 앞에서 밝혔듯이 소련이란 커다란 세력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날조된 역사는 눈 귀가 다 막혀진 북한에서나 통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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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