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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동북 항일 연군 6사단장|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제자=김홍일>

소련으로부터 동만에 파견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에 속했던 김일성(김성주가 아님)이 1936년 4월께 제2, 5군 합작의 혼성부대 편성으로 액목 지방을 유격구역으로 할당받아 백명 가량의 대원을 거느린 한 대장이 되었을 무렵 동북인민혁명군은 모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중 공당서 「항일구국」위장, 군소 단체를 흡수|6사장 김일성의 행적 도용한 김성주|2로군 7군장을 맡았던 최용건은 지휘능력 없어 파면

이는 중공 당 본부가 1935년 8월 1일자로 발표한 이른바 「8·1선언」에 따른 개편이었다. 「8·1선언」이란 것은 「코민테른」 제7차 대회(1935년 7월 25일부터 8월 20일 사이에 「모스크바」에서 열렸으며 통일전선의 새 전술이 채택됨)가 진행중인 때에 「항일구국을 위해 전국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것인데 전 중국민족의 총 역량을 집결하여 일제의 침략부터 물리치자는 매우 당연한 호소를 앞세우고 있긴 했으나 기실은 그러하기 위해서도 국민정부로부터 중공당파군의 존재에 대한 확인, 보장을 받아내자는 정략적인 선언이었다.

<정략적인 「8·1선언」>

「코민테른」 제7차 대회가 채택한 통일전선전술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진다. 즉 독재정권 하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반「파쇼」 인민전선에 묶어 자기나라의 독재정권을 쓰러뜨리는데 총동원하되 공산당이 그 주도권을 잡아 독재정권이 타도된 후 공산정권으로 이행할 수 있게끔 하는 방식이 그 하나다. 다음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국가에 있어서는 자기민족의 주권을 찾기 위해 전 민족을 반제 민족통일전선에 묶어 해방운동을 벌이되 공산당이 그 주도권을 잡아 해방이 이루어지면 바로 공산정권을 세울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8·1선언」은 또 홍군(공산군)에 동북인민혁명군 및 각종 반일의용군과 합작하여 전국적 항일연합군을 결성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 선언에 따라 만주성위는 하부 당에 동북항일연군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렸다. 지령은 『제1조 동북항일연군은 동북인민혁명군, 의용군, 자위대, 구국군(이런 이름을 단 항일부대가 그때만 해도 만주의 여러 곳에 있었다), 항일 산림대(마적대를 공산당에서는 이렇게 불러줬다)의 공동조직으로서 각 부대의 구 명칭을 취소하고 동북항일연군 제○군 제○사 제○단이라 한다』, 『제2조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한 각 부대는 다음 3항을 준수한다. ①반만 항일, 동북실지의 회복, 중화조국의 옹호 ②일적·주구의 재산몰수 ③민중과 연합하여 항일 구 중국』으로 되어 있었다.

이 지령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각 군은 자기구역 안의 다른 반일부대들을 흡수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의 개편에 들어가 1936년 봄까지에는 인민혁명군 11개 군이 모두 동북항일연군 11개 군으로 편성을 마쳤다. 따라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도 동북항일연군 제2군이 되었는데 이 무렵 제2군에서는 액목에 있는 김일성의 부대를 사로 승격시켜 제2군 제3사로 편성시켰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3사의 사장(사령이라고도 불렀다)이 된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이란 이름은 동북인민혁명군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준다. 계급적 색채가 없어진 이름이다. 의용군·구국군 등의 이름을 즐겨 썼던 구 동북정권계의 항일부대라든가 또 항일전선에 궐기한 마적대들 중에는 공산당이 싫어서 동북인민혁명군과의 연합을 기피해온 부대들이 많이 있었는데 중공 당이 계급혁명노선을 후퇴시키고 오로지 「항일구국」만을 내세우는 새 전술로 전환하여 인민혁명군도 항일연군으로 개편케 하는 방식을 쓰자 많은 항일부대들이 항일연군으로 가담해 갔다.

<속 다른 계급노선의 후퇴>

그러나 이와 같은 전술은 어디까지나 「전술」이었지 중공당의 본심일수는 없었다. 동북항일연군 자체가 만주성위의 지시 하에 움직였고 또 연군 안엔 조직적인 당 세포가 들어박혀 있어, 흡수되어온 다른 항일부대원들에 대한 이른바 사상개조사업도 더욱 치밀했다. 따라서 동북항일연군은 동북인민혁명군 때나 마찬가지로 엄연히 중공당 만주성위 예하의 공산군이었다.

이때 남만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우리의 조선혁명군도 같은 남만의 동북항일연군 제1군으로부터 합류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일찍부터 공산당의 본질을 잘 알고 있던 조선혁명군은 항일연군에 들어가지 않고 굳건히 주체성을 지켰다.

동북항일연군은 당 지시로 개편을 마치자 늘어난 세력을 효과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11개 군을 더 크게 3개로군으로 나누어 제1, 2군을 제1로군(총 사령 양정우)하에, 제4, 5, 7, 8, 10군을 제2로군(총 사령 주보중)하에, 그리고 제3, 6, 9, 11군을 제3로군(총 사령 조상지, 그 사후엔 장수첨)하에 두게 하였다. 그해(1936년) 6, 7월께 까지는 이 편제를 모두 마쳤다.

<조선혁명군에도 마수>

이 새 편제에 따라 제 1, 2군이 제1로군 지휘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제2군의 제1, 2, 3사는 각기 제4, 5, 6사로 불리게 되었으므로 김일성의 부대이름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3사이던 것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가 되었다. 동시에 이제 6사는 더 남하하여 무송·장백현 쪽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 받았다.

동북항일연군은 노군-군-사-단-연-배-반으로 되어 있었고, 군 이하는 대체로 삼-삼제였다. 1개 사는 약 1백 명 내지 1백 50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이 무렵 제2군의 제4사(그 전신은 제2군 제1사였고 2사장은 주진 이었으나 그는 민생단 사건으로 탈주했었다)의 장은 같은 한인 안봉학 이었으며(제4사의 정치위원은 중국인 주수동) 그 밑의 제4단장은 최현 이었고, 정치위원은 임수산, 그 밑 제1연장 남일, 제2연장 김명팔, 제3연장 박득룡 등등이 모두 한인이었다. 이 제4사는 김일성의 제6사가 무송·장백현 쪽으로 남하한 뒤를 이어 액목 지방에 근거지를 잡았다.

이 제1단장 최현은 1935년 11월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 제3단장 방진성 밑에 있다가 1936년 초에 동군 제1사 제1단 제4연장 및 동 제1단 군수처장을 거쳐 1936년 여름께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4사의 제1단장이 되어 있었다. 이 최현도 제6사장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지금 북한의 소위 인민무력부장인 최현과는 동명이인이다(후에 밝힘).

제4사장 안봉학은 이해 10월에 일만 측에 투항했다. 그 후임은 정치위원으로 있던 주수동이다.

이 무렵 북만에 자리잡은 제3로군 제3군 제4사(사장 학귀림·중국인)의 정치주임에 김책이 있었고, 제2로군 제7군장에는 이학만이 있었는데 얼마 안 가서 이학만은 죽었고 그 후임엔 최석천(최용건)이 앉았다가 이자는 군 지휘능력의 부족이 지적되어 곧 군장으로부터 파면되고 군 당위의 서기자리에 돌려졌다.

<1단장 최현은 동명이인>

북한의 김성주는 이때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그의 활동을 기록한 자료는 아무 데도 없다. 그리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의 개편을 서두르고 있을 무렵인 1936년 2월에 김성주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1968년 이후부터의 주장)하여 그 부대를 이끌고 압록강 연안 무송·장백 지방으로 진출했다고 하고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실존하지 않은 부대이고, 무송·장백 지대로 진출한 것은 다름 아닌 제6사장 김일성이었다. 그리고 그는 김성주와는 딴판의 사람이었다. 북한에서는 이 제6사장 김일성의 행적을 김성주의 것으로 도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가들이 이 제6사장 김일성을 김성주 인줄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제6사장 김일성은 전회에서도 밝혔듯이 그때 이미 소련서 공산대학까지 다녔던 함남태생의 35세(1936년 현재)의 장년이었다. 이때 김성주는 24세였다.

▲정정=7일(일부지방 8일)자 본란 5단 끝으로 9항과 13항 중 1931년은 「1934년」의 잘못이옵기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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