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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김재명을 5공 비리로 몰았지만 나온 건 200만원 뿐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1988년 6월 김재명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왼쪽)과 배일도 노조위원장이 군자 지하철기지 내 노조 회의실에서 작성된 합의서를 교환하며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4반세기 전 그때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하던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온갖 명목의 뇌물이 넘쳐났었다. 금융실명제나 공직자 재산등록도 없었다. 지금은 공무원이 어떤 이유로든 돈을 받으면 처벌을 각오해야 하지만 당시는 적당히 묵인되던 사회였다. 청와대 비서관실에 소형 금고가 있을 정도였다.

1988년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6공화국 노태우 정권으로 바뀌면서 ‘5공 청산론’이 강하게 대두됐다. 민주화 바람과 함께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부정축재를 저지른 ‘실세(實勢)’들을 사법 심판대로 보내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초대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을 지낸 김재명씨도 그중 하나였다. 국정감사장에서도 집중 성토가 됐지만, 예비역 육군 소장 출신인 그가 육사 후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호 아래 전횡을 일삼고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는 풍설이 파다했다. 그는 전 대통령 재임기간 7년 내내 공사 사장을 지내며, 지금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2, 3, 4호선 대부분을 건설했다.

당시 검찰을 출입하던 나는 5공 비리 첫 타자로 그를 지목하고 대검 중앙수사부 검사에게 이같은 의견을 냈다.

“수사해야겠네.”

이미 내 머리에는 김 사장이 비리의 당사자란 심증이 굳어졌고, 마음속에는 군사독재의 거악(巨惡)을 척결하겠다는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특별수사의 베테랑이자 훗날 검찰 고위직까지 오른 그 검사는 수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아직 확보된 증거자료는 없었다.

마침 국회에서 조사 중인 비리의혹 내용을 근거로 ‘서울지하철공사 곧 수사’라는 제하로 신문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검찰이 정예 수사요원을 투입해 조사에 나섰으나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악소문은 풍성한데 입증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주 교묘하게 비리의 흔적을 ‘세탁’한 것 같았다. 담당 검사는 난감해했다. “도대체 뭘 가지고 조사하지?”

고관대작 사는 곳이 산동네 2층집
나도 직접 취재에 나섰다. 어느 날 저녁 늦게 김 사장의 상도동 자택을 찾아갔다. 산동네 오래된 2층 양옥인데 고관대작 집치고는 너무 허술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행색이 초라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주인 계십니까?”

그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가 주인인데요….”

처음에는 부정축재를 하는 사람들의 위장술인가 의심했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보통 집 살림과 다를 바 없었다.
김 사장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남편이 워낙 고지식한 성격에 매사 군대식이라 직장이나 집에서나 문제가 많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약수터에 갔다 와서 식탁에 앉았을 때 아침밥이 1분 1초라도 늦으면 불호령이 나요. 그러니 곁에 있는 사람 누군들 좋아하겠어요?”

그러나 군대 시절에도 월급 외에는 손을 안 대는 ‘원칙주의자’로 유명해 그 때문에 전 대통령에게 발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밤늦게까지 기다렸으나 김 사장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 연속 이틀간 그 집을 찾아갔다.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김 사장의 팔순 노모를 비롯해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수사관처럼 방 하나하나를 다 들어가 보았다. 주변 동네 사람들도 탐문조사했다. 이웃들은 부인이 시장도 잘 안 가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살 정도로 검소하게 산다고 증언했다. 구멍가게를 찾아갔다. 김 사장네는 두부·계란·설탕·밀가루·비누 등을 외상으로 사서 월말 봉급날 일괄 계산했다(그때 서민 동네에선 흔히 그랬다). 구멍가게 주인이 보여주는 외상장부 액수를 보니 고작 몇 만원이었다.

취재 결과 김 사장은 오히려 매우 청빈한 사람이었다. 엄청난 이권이 있는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업자들이 주는 막대한 ‘떡값’을 외면했고, 권력 실세들의 부탁도 거절했다. 게다가 불같은 성격, 군대식 사고방식과 행동 등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이러니 권력자도, 업자도, 직원도 그를 좋아할 리 만무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그는 안팎으로 적을 만들었고 그것은 악성 루머로 부풀려졌다.

수사 검사도 “우리가 사람 잘못 봤어”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비리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수사 검사도, 나도 고민에 빠졌다. “우리가 사람을 잘못 찍었어…!”

그러나 검찰이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미 정치권과 언론은 사법처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여론의 희생양으로 구속됐다. 고작 고향 후배 회계사가 연말 인사치레로 200만원을 건넸다는 사실로 말이다.

처음부터 그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고 보도를 주도했던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오보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오보 아닌가?
기자로서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김 사장에 대한 해명기사를 솔직하게 쓰는 것뿐이었다. 나는 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부장은 한참 나를 쳐다보다가 한마디했다. “써 봐.”

나는 그가 구속되던 날 해설기사를 통해 그간 취재한 내용을 실었다.
‘엄청난 비리라는 소문만 요란했을 뿐 실제 밝혀진 것은 판공비 횡령 정도다. 당초 5공 정경유착 차원서 수사했으나 사장 7년에 뇌물 200만원은 의외였다.

김씨의 집은 15년 전 산꼭대기에 직접 지은 것이며 가족이 자가용차를 타고 다니지 못하게 할 만큼 가족 관리에 철저했다. 김씨 주변에선 그를 일밖에 모르고, 타협이나 로비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보고 있으며…’.

뇌물 잘 먹고 잘 쓰면 칭찬 받던 시절
이 사건을 계기로 확실하게 체득한 점이 우리나라에서 ‘돈의 사회학’이었다. 뇌물 관행에 익숙한 구성원들은 공범의식으로 서로 묵인해 주는가 하면 “내가 받으면 떡값, 남이 받으면 뇌물”이라는 이중 잣대로 사안을 해석하곤 했다.
당시 노련한 검찰 수사관들은 수뢰공직자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눴다.
첫째, ‘(뇌물을) 잘 먹고 잘 쓰는 사람’. 대표적인 부패 공무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구설에 오르지 않고 출세도 잘하는 유형이다. 돈을 바치는 대로 업무처리가 확실해 업자로선 반가운 상대다. 주변 동료나 상사도 잘 쓰고 함께 나눠 먹는 스타일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 화끈해.” “사람 좋아.” 이른바 ‘전두환 스타일’이다.
둘째, ‘받기는 하되, 안 쓰는 사람’. 이런 노랑이 스타일에 대해선 대개 주변 동료들이 암묵적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업자들은 침묵을 지킨다. 돈을 받았으니 언젠가는 도와주겠지라며 기대한다. ‘노태우 스타일’이다.
셋째는 ‘받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사람’. 어찌 보면 청백리감으로 표창받아야 할 이런 유형이 오히려 가장 구설에 오르고, 구속될 확률이 높다. 이런 유형은 업자들에게 요령부득이다. 만나주지도 않고 도대체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 동료들에게도 ‘눈엣가시’다. 흔한 회식자리조차 마련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한 갖가지 루머와 투서가 횡행한다. 김 사장은 불행하게도 이 범주에 속했다.
한 사람을 놓고 내리는 평가가 얼마나 불완전하며, 그 다중집합(多衆集合) 격인 여론도 때로 그 사람의 진면목과 180도 상반되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비록 김 사장 집을 찾아가 실상을 확인해 보도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세상의 여론만 듣고 한 사람을 구속시키는 데 어느정도 기여한 셈이었다.

내 잘못 인정한 덕에 인연으로 승화
김 사장 구속 후 1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오후 전화가 걸려왔다.
“나 김재명입니다. 신문사 앞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 있으니 잠깐 뵙시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전화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들렸다. 그 거친 성격으로 내게 행패라도 부린다면…. 참으로 난감했다. 피할 수도 없고 정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저만치 김 사장 내외가 일어서는 모습이 포착됐다.
김 사장은 내 예상을 깨고 정중하게 인사하고,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항의하러 온 것이 아니라 감사하러 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구속되던 날 내가 써준 기사 덕분에 자신의 명예가 회복됐다고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내가 검찰 수사를 촉발 시킨 장본인이며 죄송하게 됐다는 말에 대해서도, 자신은 어차피 미운털이 박혀 정치적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도리어 작은 선물 꾸러미를 내게 전했다.
“기자님도 나처럼 부인한테 잘해주지 못할 것 같은데 아주머니께 꼭 전해주세요.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제 작은 정성입니다.”
순간 내 마음속에 뜨거운 무엇이 치밀었다. 동시에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묵혀 있던 체증(滯症)이 일순간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세상 일이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반전될 수도 있구나!!
자칫 평생 악연(惡緣)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김 사장과의 인연은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17년간 이어졌다. 명절 때마다 고향에서 키운 버섯을 선물로 보내주는가 하면, 내가 신문사를 나와 고생하고 있을 때는 찾아와 밥을 사고 격려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의 육사 후배인 고명승 대장과 함께 을지로 평래옥에서 냉면을 먹으며 시국을 이야기했다. 몇 달 뒤 그는 타계했다.
지금 돌이켜볼 때 만약 그가 구속되는 상황에서 내가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내 평생 부끄러운 일로 남았을 것이요, 김 사장도 원망과 한탄 속에서 살았을지 모른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다. 문제는 이후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나는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당장은 어렵지만 먼 훗날 돌아보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내 양심에 ‘주홍글씨’처럼 남았을 수도 있었던 그 사건, 원한(怨恨)으로 끝날 수 있었던 그 인간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역전(逆轉)된 것은 바로 ‘정직(正直)’을 선택한 덕분이었다.
우리가 매사 정직하고 진실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정직은 아름답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힘 중 하나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함영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jmedi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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