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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제자=김홍일|이홍광과 동흥사건

북한측의 주장에 의하면 김성주는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면서 1932년 봄부터 동해 일대에서 굉장한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1932년11월께 압록강·두만강 대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50여명의 각종 항일부대의 대장명단(근거지·병력 등 명시)이나 1933년11월께 또 같은 1백20여명의 명단 속에도 김성주에 해당될 듯한 이름은 물론 김일성이란 이름도 없다.

1933, 4년께. 대안에는 중공당 왕청현위 유격대장 이광일(1930년5·30 간도폭동 때 중국인부잣집을 습격, 방화·살인했던 사람)또는 동만 특위 소속 유격대장 조춘학 등이 수명씩의 부하를 거느리고 나타났었다.

대규모 동흥 기습공격…일제에 큰 충격|이홍광 부대 항일투쟁, 북괴선 일체 언급 안해|김일성의 유일·최고 경력 조작 위해 선배 공산운동 모두 묵살

<최초의 국내진공 항일작전>

1933년1월3일에는 무산군 영북면 지초동에 화룡현위소속 김수원의 11명이 나타나 군자금을 털어간 사건이 있었고 1933년9월18일에는 혼춘현위소속 영남유격대장 오일파가 13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함북 경원군 대안에 나타났다가 왜경과 교전했다.

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간도에서 결성되고서는 제2군 제2사의 한 연장인 양성룡 이하 40명이 1935년1월5일 및 9일 두 차례에 걸쳐 수성·훈계 양경찰서 관내를 습격한 일이 있다.

1935년5월에는 제2군 제2사 제4연장 김화 이하 30명이 함북 신아산 대안에서 교전했다. 이상은 모두 한인공산유격대가 한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이란 인물은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김일성이란 이름이 등장했데도 그것은 김성주가 아니다.

북한에서는 김성주의 경력만을 최고의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이상의 유격대들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중공당내 한인공산유격대의 국내 진공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던 첫번째의 사건은 1935년2월13일 오전0시30분 평북 동흥읍이 습격되었던 사건이다.

이 동흥사건은 남만의 반석현에서 중공당 남만특위하에 제일 먼저 결성되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총사령 중국인양정우)의 제1사 사장 이홍광 부대가 일으켰다.

<병력 2백, 경찰서 등 공격>

이홍광 부대는 2백명의 병력으로 대안이역류에서 강을 건너 경기2정을 앞세우고 3대로 나누어 동흥읍을 포위, 경찰서·금융조합 등을 중점적으로 공격했다. 이홍광 부대의 사격이 동흥경찰서의 건물에 집중되고 있는 동안 1대는 읍내의 자산가 장영녹집을 방화한 것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재물을 털었다. 교전은 2시간여에 걸쳤다. 경찰관 3명이 부상당하고 민간인 3명은 죽었고 5명은 부상했으며 인접 경찰서의 응원대가 도착할 기미를 알자 침공대는 16명의 민간인을 납치해 가지고 당당히 나팔을 불며 대안으로 철수해갔다.

맹렬한 백병전이었다. 이홍광 부대에도 사상자가 났었다.

이홍광 부대는 동흥읍을 습격하기 전에도 대안 각처를 습격하고 다녔다. 다른 항일부대들과 연합해서 1934년4월3일엔 3백명의 병력으로 임강현삼분자를, 27일엔 4백명으로 동현림자두를 5월30일, 6월12일 양차에 걸쳐서는 평북후창서 부흥주재소 바로 대안을, 또 6월중엔 통화현륙도구를, 11월엔 집안현삼도구를 습격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동북인민혁명군의 선언·강령을 비롯해서 각종 격문을 살포했는데 동흥을 습격했을 때도 각종 격문을 살포했었다.

동흥읍이 동북인민혁명군의 이홍광 부대 2백명 외 큰 병력에 의해 습격 받았다는 충격적인 보고에 접한 평북 경찰부는 단하부장 진두 지휘하에 인근의 중강·자성·후창·의주 등 각서에서 경찰기동대를 동원, 수야택삼랑 의주서장이 대장이 되어 1백명의 병력으로 이홍광 부대를 추격하기도 했다. 또 강계수비연장 송전중좌 이하 2백명의 병력도 동원되었다.

이홍광 부대의 본거지는 동흥읍 대안팔도치대호라고 하는 915m의 산악지대. 경찰대는 2월17일 새벽3시 동흥을 떠나 대호로 향했다. 영하 38도의 추위였다. 강안에서 약60리 가량 대호쪽으로 갔을 때는 그 날 아침9시께였는데 산의 눈 위를 뒹굴면서 뛰어오는 4, 5명의 그림자가 있었다. 납치되어 갔던 민간인 16명중의 일인 수승송태낭과 남 등이었다. 석방되어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홍광 부대는 총병력 약6백명, 그 중 중국인이 7할, 한인 3할인데 간부들은 모두 한인(이부대는, 이홍광이 중공당본부에서 파견되어 왔기 때문에 민생단 사건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이며 전방 약15리 가량 되는 험준한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있었으나 오늘 아침 일찍부터 어디론가 이동을 해서 자기들이 석방 될 때엔 몇 사람 안 남았더라는 것이었다.

경찰대가 이홍광 부대의 근거지인 대호란데 도착해보니 몇 십리의 울창한 수해가 주위의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견고한 요새지였다. 집이라곤 60호 가량이 띄엄띄엄 있었으나 아무도 없는 빈집이었다.

사방에 전망대가 설치돼 있어서 적의 동정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간신히 추격해 갔으나 허탕이었다. 이홍광 부대는 17일 새벽에 수십 대의 썰매 우차에 짐을 싣고 밀림새를 누비며 무송현 방면으로 멀리 이동해 간 후였다.

<이홍광은 19세의 처녀설도>

수등·남등 귀환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홍광 사령은 19세의 미모의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붙잡혀 가서 처음 2, 3일 동안은 채이고 얻어 맞고 학대가 심했는데 나중에 이홍광사령 앞으로 끌려나갔다.

쳐다보니 이 사령은 남장을 하고 있으나 얼굴·목소리·태도 등이 아무래도 젊은 여성 같았다. 이 사령 수등에게 『내 얼굴이 기억나는가』고 물으면서 『너는 몰랐겠지만 작년9월 도로공사 때 여러 인부들 속에 남장하고 끼여 있었던 난데 그대의 산발이 지금 이만큼 자랐다』고 하면서 모자를 벗어 보이더라는 것이다.

수등은 토목업자였는데 자세히 보니 과연 작년 공사 때 인부들 속에 예쁘장한 남자애차림으로 끼여 있었던 그 사람이 틀림없었다.

일인들은 그 다음부터 여러가지 설교를 듣고 대우도 잘 받고 풀려 나왔다. 공산군에서는 특별히 써먹을 필요 없는 사람은 자기들에 대한 선전용으로 교양을 주어 석방해 주는 전술을 잘 썼던 것이다. 이래로 평북 경찰부에서는 대안에 출몰하는 동북 인민 혁명군 제1사사장 이홍광은 19세의 미소녀인 것으로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홍광 부대의 한 계략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상해의 중공당 중앙으로부터 유격활동 지령을 받고 남만에 와서 1932년에 벌써 중국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를 조직했으며 이것이 기초가 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가 결성되어 2사장으로 있었던 이홍광이었는데 그가 1935년에 19세 정도 밖에 안될리는 없다. 또 그 정도의 인물이 위험한 적 속에 파견되어 도로공사의 인부노릇을 하면서 적진을 정탐하는 일도 쉽지 않다.

<도로 인부가장, 적정정탐>

또 풀어 보낼 일인들에게 사장이란 막중한 간부의 정체를 보일 까닭도 없다. 이홍광 사령이 여성이란 것은 알려진 일이었으므로 딴 여대원을 이홍광으로 위장시켜 보인 것이며 그럼으로써 진짜 이홍광 사령의 정체를 모르게끔 하자는 계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동흥읍이 습격 받은 2월13일은 국경경비대위문의 저녁이라 해서 저녁에 전국적인 위문 방송이 있게 되었던 날인데 공교롭게도 전날 심야 새벽0시30분에 국경경찰서가 습격 받아 쑥밭이 되었으니 일제의 간담이 한층 더 서늘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홍광 사령은 그해 3월에 죽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이홍광의 활약에 대해 일체 언급 안 한다. 김성주에 앞선 선배 공산주의자들의 활약을 말하게 되면 김의 경력을 유일 최후의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딱 석자, 남만에 「이홍광」이란 사람이 있어서 유격활동을 했다는 그 말뿐이다. 【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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