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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자=김홍일>|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이명영 집필 (성대 교수 정치학)

무송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던 김성주 일당을 응징하여 한·중 민족 사이에 알력이 없도록 하기 위해 무송으로 출동했던 우리 민족주의 독립군인 조선 혁명단의 유하현 삼원포 주둔 고동뢰 소대장 일행 10명이 무송에서 무참히도 김성주에 의해 참살됐다는 충격적인 비보는 조선 혁명군 본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1931년9월18일의 만주 사변 이래로 일제의 관동군이 온 만주 천지를 뒤덮고 일제에 대한 모든 반대 세력에 압박을 가하고 있던 때인지라 조선 혁명군에서는 병력과 무기가 매우 소중한 때였다.
<곳곳에서 버림받은 김성주>
김성주 일당을 토벌해야 하겠으나 워낙 도망 길이 빠른 김성주다. 어디로 종적을 감추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뿐 아니라 조선 혁명군이 치안을 확보하고 있는 국민부 관할 지역으로 언제 관동군이 진격해 올지도 모를 형국 이어서 조선 혁명군은 동포 사회의 보호와 진격해 올 관동군과의 일전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은 그해 (1932년) 3월1일에 일제의 음모로 소위 만주국의 성립이 선포되어 그나마 일맥 상통하던 장학량의 동북 정권은 물러가고 전 만주에 대한 일제의 지배권이 확립되어 가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자 전열의 재정비를 위해 혁명군의 중심지를 흥경현으로부터 한만 국경까지의 중간 지점인 환인현으로 옮겼다.
때마침 그해 4월에 장학량 정권계의 환인 주둔군 단장이었던 당취오가 반만 (만주국)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요령 민중 자위군을 조직, 동변도 (일제 때의 만주국 행정 구획에 의하면 안동성·통화성·봉천성·길림성·간도성의 산악 지대에 해당하는 지역) 일대에서 기척 하자 조선 혁명군은 이 당취오 부대와 제휴, 그 특무대로서 공동 작전을 폈다. 따라서 조선 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은 동시에 요령 민중 자위군 특무 대 총사령이란 직함을 가졌었다.
이러던 참인 이해 여름 난데없이 김성주가 몇몇 자기 또래의 친구들과 같이 이 조선 혁명군 본부에 나타났다. 김성주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다. 무기도 없이 빈털터리로 나타난 이들은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면서 조선 혁명군 밑에서 일하겠으니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무송에서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달아난 처지에 그 조선 혁명군 본거지로 기어들었다는 것은 무송을 탈출해 사방을 떠돌아 다녀 봤자 결국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방에서 반만 항일의 중국인 의병들이 궐기했지만 그 어느 부대에서도 정체 불명의 김성주 일당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산 운동의 흐름조차 몰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들이 한인이었으므로 오히려 일제 관동군의 앞잡이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또 그때 아직 중공당계의 의용군은 조직되기 전이었으며 길림과 통화의 중간 지점인 반석 (중공당 만주성위·남만특위·반석현위의 본거지)에 가장 유력한 한인 중심의 공산 유격대가 하나 탄생해 있기는 했어도 그때까지 중·한 공산당계의 어느 조직에도 가입해 본 경력 이 없는 떠돌이 김성주 등이 반석 유격대에 가담할 수 없었을 것도 당연하다.
가담할 수 없었을 뿐이 아니라 도시 그런 조직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중·한 공산주의 운동의 본류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도 김성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조선 혁명군에나마 의지해 보려고 기어든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무기도 없이 빈털터리의 몸이었다는 것은 사방에서 쫓겨다니던 몸이었기 때문이다. 소속 불명의, 정체 불명의 젊은것들이 무기를 지니고 다녔으면 관동군으로부터도, 반만 항일의 의용군으로부터도 쫓겼을 것이다.
쫓기다 보니 무기를 다 팽개치고 정말 갈데 없으니 할 수 없이 조선 혁명군으로 용서를 빌며 찾아온 것이다.
조선 혁명단에서는 제발로 기어 들어온 김성주 등을 놓고 그 처리에 관해 회의가 열렸다.
<용서해 주니 소대장 달라고>
모든 간부가 고동뢰 소대장 일행의 살해 죄로 김성주 등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총사령 양세봉은 「강자는 불살」이란 병가의 도리를 생각하여 김성주 등을 살려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랬더니 김성주는 엉뚱하게도 조선 혁명군의 소대장이나 중대장 자리를 하나 달라고 했다. (여기에서도 김성주의 우쭐대며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그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다).
양 총사령은 이 어이없는 청을 점잖게 타일러 물리치고 우선은 열심히 심부름이나 들으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함부로 믿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무기도 주지 않았으며 공작에도 쓰지 않았다.
김성주는 자기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신임을 받지 못하면 자기의 전과에 비추어 언제 무슨 일이 있은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음인지 방랑벽에 젖어 질서 있는 생활을 감내 못하는 김명주는 어느 날 슬그머니 조선 혁명단을 떠나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풍설로는 유하현 삼원포 쪽에 있는 국민당 좌파의 포경화 밑으로 갔다고도 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훨씬 몇 해가 지난 후에는 김성주가 중공당 유격대에 들어가 대원으로 있다는 풍문도 있었으나 그것도 확인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1932년 어름에 조선 혁명군을 떠난 이후 김성주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증인은 없다. 1932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그때까지 그를 보아 왔던 사람들은 1945년10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양에 나타난 김성주를 다시 보게 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길림에는 신숙을 대표로 하는 교민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재만 동포의 구조를 호소하기 위해 두 사람의 대표를 서울의 미군정 당국에 파견했다. 대표는 양세봉의 동생 양정봉과 이규동 (살아 있으면 80여세)이었다.
이들은 서울로 올 때엔 배로 인천을 거쳐왔고 서울에서 이규동은 남고 양정봉은 길림으로 돌아갈 때에 북한을 거쳐갔다. 이 무렵 재만 한교 대표로 또 한사람 최혁주가 평양·서울을 다녀갔다. 이 두 사람은 만주에 돌아가서 귀환 보고를 했는데 최혁주 (69·용산 거주)는 남한이 살기 좋더라고 했고, 양정봉은 북한이 좋더라고 하여 두 사람의 보고가 엇갈렸던 일이 있다.
<양 사령의 미망인 등 돌봐 줘>
양정봉은 친구인 이시찬씨 (63·서울 거주)에게 『평양에서 김성주를 만났다. 김성주는「조선 혁명군에 갔을 때 자기 목숨을 살려준 것은 양세봉 사령인데 생명의 은인이니 양 사령의 미망인과 아이들을 맡아 돌봐 주겠다」면서 평양으로 보내 달라 했다』고 털어놓았다.
양정봉은 김성주가 왕청문의 남만 학원에 와 있을 때도 또 그가 양 사령에게 와서 용서를 빌 때도 김성주를 만났던 사람이다. 그후 양 사령의 미망인과 그 아이들은 평양으로 갔고, 아들은 대학까지 다녔다는 소식이다. 양정봉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이 1932년2월께 (우리 독립군을 몰살하고 무송을 떠난 때)부터 그해 여름까지 (조선 혁명군에서 달아났을 때)의 일에 대해서도 전부를 거짓으로 꾸며 놓고 있다.
즉 김성주가 『1932년4월에 안도에서 최초의 항일 유격대를 조직했다』느니 그해 여름에 『민족주의자들의 무장력인 독립군의 사령 양세봉과 담판하여 민족 단결을 호소했다』느니 하는 식이다. 「조선 혁명군의 사령 양세봉」이라고 하지 않고 「독립군의 사령 양세봉」 이라 한 것은 김성주가 감히 조선 혁명군을 자기가 조직했다고 날조하고 있는 판이니 조선 혁명군 사령이란 말을 못쓰고 그냥 독립군 사령이라 얼버무린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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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