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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법으로 효를 강제할 수는 없다

신성식
사회부문 선임기자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한국 노인 빈곤에 대한 ‘도발적인’ 기사를 실었다. 한국인의 효심이 약화되고 사회보장장치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노인들이 배를 곯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게 요지다. 기사 마지막의 이씨 할아버지(82)의 말이 가슴 아프다. “한국전쟁 직후 ‘밥 먹었느냐’가 인사였는데, 지금 내가 쌀 떨어지는 것을 다시 걱정하고 있다.”



 정부가 발끈해 “기초연금 등 복지정책을 강화하고 있다”고 해명자료를 냈지만 그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린다. 기사가 다소 자극적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었다.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이라고 여기는 서양인의 눈에 한국의 효(孝) 사상은 매우 독특하게 비칠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1889∼1975)가 1973년 “한국 문화에서 앞으로 인류에 가장 크게 공헌할 게 있다면 바로 효일 것”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당시만 해도 건강보험 같은 초보적인 복지조차 없었으니 ‘효도=복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후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효가 많이 엷어졌다. ‘가족이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98년 열 명 중 9명에서 2012년 3명 정도로 줄었다. 대신 가족·정부·사회가 부양해야 한다는 사람이 2002년 2명 정도에서 5명으로 증가했다(통계청 사회조사). ‘사적 효심’이 ‘공적 효심’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 법무부가 상속재산의 절반을 배우자에게 먼저 떼주는 쪽으로 법을 개정하려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효심 약화다. 자녀에게 많이 상속해 봤자 혼자 남은 부나 모를 부양하지 않는다는 거다.



 자녀가 부모에게 주는 생활비는 월 17만원, 기초노령연금 같은 공적 지원금은 21만원이다(2011년, 노인실태조사). 둘 다 빈약하다. WP가 인용한 이씨도 자식이 둘 있지만 도움을 못 받고 있다. 자식의 부양이 줄면 공적 부양이 늘어야 하는데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복지제도는 자녀의 부모 부양을 전제로 설계돼 있다. 부양의무자 기준이 그것인데, 일종의 정부가 책정한 ‘효 의무 기준선’이다. 아이 둘을 둔 4인가구라면 월 소득이 212만원을 넘지 않아야 부양능력이 없다고 보고 정부가 지원한다. 213만~413만원이면 일정액을 깎고 지원한다. 재산이 집만 있을 경우 3억1600만원을 넘으면 안 된다. 그동안 효 약화를 반영해 기준을 완화해 왔지만 아직도 여기에 걸려 최저생계비 이하의 생활을 하는 극빈층이 117만 명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정이 딱할 경우 국가가 먼저 부양한다는 점인데, 그 다음이 문제다. 자식에게 그 돈을 강제 징수한다. 이런 규정을 알면 부모는 포기한다. 연락이 잘 안 오는 자식이긴 하지만 피해가 간다고? 그냥 굶주리고 아파도 참는다. 그러다 목숨을 끊기도 한다. 정부가 올 10월 기준선을 480만원으로 올린다고 한다. 그래도 얼마 구제되지 않는다. 기준 완화는 언 발에 오줌 누기와 같다. 선진국에서 특정 복지수당의 전제조건으로 자녀의 부양 능력을 따지는 데가 별로 없다(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



 서울 광화문 전철역에는 장애인단체가 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하며 525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지만 사회적 관심이 그리 높지 않다. 며칠 전에는 39세 장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당 주민센터 관계자는 “부양의무제 때문에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다가 탈락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복지와 정보통신기술(ICT)이 결합하면서 대상자 선정이 매우 투명해졌다. 웬만한 소득과 재산은 다 드러난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살짝 넘겨 탈락한 경우도 많다. 금융위기 이후 살림은 팍팍해지는데 기초수급자는 137만 명으로 줄었다. 2009년에는 157만 명이었다.



 정책의 투명성은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한 쪽을 죄면 다른 쪽은 풀어야 한다. 한꺼번에 풀 수 없다면 교육비든, 의료비든 가능한 것부터 부양의무제를 없애거나 아주 잘사는 자녀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자. 효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보스 포럼에 전한 편지에서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과 함께 가는 자본주의’를 강조하지 않았는가.



신성식 사회부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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